과학기술의 발전과 인터넷의 일상화로 인류는 물질적 풍요로움을 경험하고 있지만, 정신적 공허감은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 이와 맞물려 인문학, 종교, 명상 등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불교(佛敎; Buddhism)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사성제(四聖諦; Four Noble Truths)’는 불교 최초의 가르침으로 인간 존재의 ‘고통’과 그 해결법에 대해서 다루고 있으며, 현대 의학의 질병에 대한 접근법과 유사하다. Freud는 정신분석이 인간의 히스테리로 인한 비참함을 보편적인 불행 정도로 바꾸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하였다(Freud와 Breuer 1895). 불교와 정신분석은 인간의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과 그 최종 목표가 다르지만, 인간의 심리적 고통을 다룬다는 공통점이 있다. 본 논문은 총 2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불교의 대표적 주제인 사성제 중 고성제(苦聖諦)와 집성제(集聖諦)의 개별적 내용을 각각 분석하고자 했다. 첫 번째 논문에서는 사성제의 첫 번째 내용인 고성제를 중심으로 불교의 ‘고(苦)’의 개념이 정신분석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비교해 보았다(Kim과 Ha 2021).
사성제는 2500년 전 불교의 창시자인 붓다가 설한 최초의 가르침으로 초전법륜경(Dhammacakkappavattana Sutta)에 실려 있다. 사성제는 “네 가지의 고귀한 진리(Four Noble Truths)”를 의미하여 고성제(苦聖諦), 집성제(集聖諦), 멸성제(滅聖諦), 그리고 도성제(道聖諦)로 이루어져 있고, 간단히 고집멸도(苦集滅道)라 부른다. 고성제는 인간의 삶은 본디 고통이고, 집성제는 고통의 원인은 갈애(渴愛)이며, 멸성제는 고통의 원인을 완전히 없앨 수 있다는 가르침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도성제는 고통의 원인을 없애는 방법으로 팔정도(八正道) 및 중도(中道)를 의미한다. 붓다는 사성제야말로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하는 실제 길이라고 하였다(Bhikkhu Kakmuk 2010).
불교는 삼법인(三法印)을 통해 모든 삼라만상(森羅萬象)은 고통(일체개고,一切皆苦)이라고 하면서 그 원인을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제행무상; 諸行無常)과 고정된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제법무아; 諸法無我)으로 설명한다. 세상의 모든 현상이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因果)의 법칙에 따라 구성되어 있으며, 상호간의 관계성과 의존성 안에서 일어난다는 연기(緣起)의 법칙을 따른다. 불교의 고통에 대한 인식은 우주론적인 보편성으로부터 출발하며 무상(無常)과 무아(無我)를 통찰하는 것을 통해 고통을 해결하고자 하는 반면, 정신분석은 정신 발달 및 생애 초기의 경험들을 통해 고통을 설명하고 환자로 하여금 개개인의 과거를 분석하여 통찰함으로써 해결하고자 한다는 측면에서 차이를 보인다(Kim과 Ha 2021). 저자들은 1부의 논문에서 고성제의 여덟 가지 고통에 대해 정신분석적 해석을 하였다. 특히 오취온고는 불교에서 핵심이 되는 고통으로, 모든 고통이 ‘실제적 존재로서의 자기 있음’이라는 착각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불교는 고정되고 실체화된 자기에 대해 인간의 집착하는 경향을 직면시키고, 무아를 이해함으로써 이를 해결하려고 한다. 이러한 인간의 자기에 대한 집착에 대해서 다양한 정신분석적 해석을 통해, 서양문화권에서 시작한 정신분석은 건강한 자기 감각을 중요시하는데 반해 불교는 자기 감각 자체를 허상으로 파악한다는데 있어 차이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고정된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에 대한 개념화와 동일시를 거부하는 무아의 개념은 정신분석과 불교에서 최종 목표의 차이점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정신분석이 개인의 과거 경험으로부터 현재를 이해하는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반해, 불교는 무상과 무아를 통찰하면서 존재론적인 현실을 직시하는 차이가 있다.
두 번째 논문에서는 집성제에 주목하였다. 인간의 고통은 연기를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일어나며, 불교의 고통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연기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또한 붓다는 사성제의 두번째 선언인 집성제에서 고통의 원인을 갈애라고 설명하고 있다. 갈애는 인간이 지닌 욕망(desire) 혹은 집착(clinging)을 의미하며, 연기를 이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방해 요소로 중요한 개념 중 하나다. 저자들은 이번 논문에서 갈애에 대해서 정신분석적으로 해석하고 중도의 개념을 정신치료에 적용해보려고 한다.
사성제의 두 번째 선언인 집성제는 인간의 고통의 원인은 갈애라고 한다. 고통의 원인을 옛 인도 말인 팔리어로 ‘탄하(tanha)’라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영어로 ‘Craving’ 혹은 ‘Desire’로 번역되며, 한글로 번역한 것이 ‘갈애’이다. 탄하는 무언가에 집착하거나 매달리는 인간의 경향으로 설명하기도 하며(Rahula 1959), 끝이 없는 열망(Kostner 2014)의 의미다. 초전법륜경에서 붓다는 집성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이다. 그것은 바로 갈애이니,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환희와 탐욕이 함께하며 여기저기서 즐기는 것이다. 즉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욕애; 欲愛), 존재에 대한 갈애(유애; 有愛),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무유애; 無有愛)가 그것이다.
불교는 죽음 이후에 삶이 다시 반복된다는 윤회(輪迴) 사상을 기반으로 한다. 붓다의 집성제에 대한 설명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갈애는 ‘다시 태어남’을 가져온다. 갈애를 해결하지 않으면 인간은 다시 태어나게 되고 고성제의 첫 번째 고통인 생고(生苦)를 겪을 수밖에 없다. 붓다는 고통을 해결하고 ‘끝없이 반복되는’ 윤회의 삶과 죽음이라는 속박을 벗어나기 위해 사성제를 설했다.
갈애는 마치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는 것처럼 대상을 즐기고 집착하는 심리현상으로 인간이 벗어나기 어려운 강력한 욕망이다(Bhikkhu Ilmuk 2020). 이러한 갈애가 고통의 원인으로서 기능하고 있으므로 없애야 한다고 붓다는 선언하였다. 붓다는 갈애를 세 가지로 나누었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욕애), 존재에 대한 갈애(유애),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무유애)인데,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다.
첫번째,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인 욕애는 형색, 소리, 냄새, 맛, 감촉의 다섯 감각 대상에 대하여 좋아하고 즐기고 집착하는 욕망이다. 좋은 경치를 보고, 아름다운 소리를 듣고, 좋은 향기를 맡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부드러운 감촉을 경험하는 것을 좋아하는 욕망을 말한다(Bhikkhu Ilmuk 2020). 욕애로 인해 인간은 좋아하는 것은 추구하고 싫어하는 것은 회피하게 된다. Kostner (2014)는 욕애를 쾌락을 추구하고 불쾌를 회피하는 쾌락원칙(pleasure principle)과 유사하다고 보았다. 병적인 욕애로 강박적인 폭식이나, 과소비, 성행위 중독과 같은 증상을 보일 수 있다. 따라서 욕애는 쾌락은 추구하고 불쾌한 것은 회피하고자 하는 본능의 작동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 욕애를 쾌락원칙과 연관해서 본다면, 정신분석적으로는 정신발달적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이 유용하다. 어린 시기에는 전체적으로 쾌락원칙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고 즉각적 만족을 추구하다가, 나이가 들면서 현실원칙이 우세해진다. 이런 성숙의 과정을 기반으로 보면 욕애는 현실원칙이 우세해지기 이전에, 쾌락원칙이 주도하는 발달 상태를 불교적 관점에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붓다는 욕애를 완전히 없애버릴 수 있고, 또 없애는 것을 추구해야한다고 말한다는 점에서 정신분석과 다르다.
한편 욕애는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리비도와도 유사한 면이 있다. 하지만 정신분석에서 인간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리비도는 단순히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떠나 행복, 만족, 생산(genesis)을 포함한다. 이런 생산적이고 긍정적 측면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교적 관점에서는 욕애를 없애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큰 차이점이다. 이는 리비도의 긍정적 측면보다는 부정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욕애가 더 나은 삶을 영위하려는 동기(motivation) 그리고 삶에 필요한 요소들을 추구하려는 필요(need)를 넘어서서, 필요 이상의 것을 추구하는 욕망(desire)의 개념에서 이해한다면, 또 충분한 만족이 아닌 끝없는 욕망을 추구하다가 해를 입게 되는 상황을경고하려는 점에서는 정신분석과도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저자들은 불교에서 욕애를 완전히 없앤다는 것을 필요를 추구하는 것을 넘어서서 욕망을 추구하는 부분은 없애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건강한 현실 이해와 적당한 욕구의 추구와 조절을 목표로 하는 것과 실제 적용하는 측면에서는 유사한 면이 많다고 생각했다.
두번째, 존재에 대한 갈애는 자신이 경험하는 현상이 영원히 존재하기를 바라는 욕망이다. 예를 들어 행복한 느낌을 경험하거나, 원하는 대상이나 상황을 경험할 때 그것이 영원히 존재하고 지속하기를 바라는 것이 유애다(Bhikkhu Ilmuk 2020). 이를 Engler (1983)는 자기-보존(self-preservation), 자기-영속(self-perpetuation)에 대한 열망으로 설명했다.
유애는 정신분석에서 유아기부터 존재하는 전능 환상(omnipotent fantasy)과 유사하다. 전능 환상은 발달 과정에서 자기와 대상에 대한 환상을 갖는 것으로 자신에 대한 전지전능한 느낌을 말한다. Freud (1913)는 ‘토템과 타부’에서 전능감을 유아기에 나타나는 사고의 특징으로 설명하였고, Ferenczi (1913)는 발달 과정에서 완전히 포기되지 않고 완화된다고 하였다. 유아는 어린 시절 울거나 보챌 때 엄마가 이를 해결해주기 때문에 유아가 스스로를 환경을 통제할 수 있는 전지전능한 존재라고 인식하지만 점차 엄마와의 분리가 일어나면서 이러한 전능감은 현실을 맞닥뜨리게 된다. 유애는 이러한 전능 환상이 정신 내적으로 일정 정도 남아서 일생을 거쳐 자기 혹은 대상과의 관계가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을 설명한 것이다.
유애는 심리사회적 발달의 측면에서도 바라볼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이 영원히 존재하기를 바라고, 가족과 친구들이 영원히 함께 하기를 바라지만, 이러한 것들이 영원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성인기 발달 과제로서, 삶의 유한함을 인정하고 사람들과 이별하게 되는 것을 수용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이며, 고성제의 노고(老苦)와 애별리고(愛別離苦)와도 일맥상통한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유애를 없애야 한다고 말하지만 이 또한 불교의 종교적 측면에서 기인한다. 저자들은 유애가 전능 환상과 유사하다면 이를 완전히 없애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Winnicott (1965)은 어머니가 제공하는 안아주는 환경(holding environment) 안에서, 한때 유아가 경험하는 주관적 전능 경험이 매우 소중한 유산과 자원으로 남는다고 하였다. 이러한 소중한 경험의 전능감은 역시 포기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우며, 일생을 걸쳐 창조성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자원을 이룬다. 불교에서 유애를 없애라는 것은 삶에서 과대한 전능감을 경계하라는 종교적 목표로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정신분석적인 관점에서 유애를 없앤다는 것은 결국, 현실적인 면에서는 자아가 과도한 전능감에 휘둘리지 않고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고, 이는 자아 성숙의 지표로 볼 수 있다.
세번째,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인 무유애는 자신이 경험하는 현상이 다시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욕망이다. 이는 괴로운 느낌을 경험할 때나 원하지 않는 대상이나 상황을 경험할 때 그것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갈애다(Bhikkhu Ilmuk 2020). 예를 들어, 삶이 힘들고 고달파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 자살을 결심하거나 자신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나 대상을 공격하고 파괴하고자 하는 것을 무유애라 한다. 무유애는 고성제의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부득고(求不得苦)와 일맥상통한다.
무유애는 정신분석적으로 파괴본능이나 공격성과 유사하다. 무유애는 괴로운 상황이 너무나 힘들어서 자신의 신체를 자해하거나 자살을 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향한 공격성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나아가 괴로운 상황을 만들어내는 타인을 향한 공격적인 태도나 폭력, 살인 등으로 나타날 수 있다.
동시에 무유애는 고통을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그럼에도 인간이 고통을 경험하고 싶지 않지만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므로 반복 강박(repetition compulsion)과 유사하다. 정신분석은 반복 강박에 대해 무의식 안의 해결되지 않은 갈등이 재현된다는 것을 환자로 하여금 깨닫도록 도와주면서 자신의 과거 경험으로부터 현재를 이해하는 과정을 중요시한다. 반면 불교의 연기에 따르면 인간이 겪는 고통은 결국 조건에 따라 이루어진 현상들이며, 이러한 현상들은 조건에 따라 소멸된다. 이는 삼법인의 제행무상과 일맥상통하며 “세상에 일정하게 존재하는 것은 없다.” 라는 불교의 가르침을 통해 고통을 이해하도록 한다. 결국 불교적 관점에서는 고통이 사라지길 바라는 것과 고통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것, 모두 인간의 환상에 불과하다.
붓다에게는 무유애도 제거의 대상인데 이때 제거라는 말에 함축된 의미가 있다고 저자들은 생각한다. 고통을 회피하고자 하는 인간의 마음은 오히려 고통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Olendzki (2012)는 고통이 무상하기 때문에 발생하지만, 실상은 무상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무상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가 문제가 됨을 이야기한다. 결국 고통을 회피하고자 자신이나 타인을 해하는 것은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느끼는 자신이나 고통을 일으키는 대상을 파괴할 뿐이다. 무유애의 제거란 고통을 회피하고자 하는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고 연기의 법칙에 따라 고통의 생성과 소멸을 바라봄과 동시에 고통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를 변화시키는 데 있다. 이런 관점은 최근 심리이론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수용(acceptance)’을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과도 유사하다.
유애와 무유애를 이해하기 위해 불교의 핵심적인 사상인 중도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중도는 붓다가 깨달음을 얻자 마자 설한 내용으로 ‘치우치지 아니하는 바른 도리’를 뜻하며,극단(極端)에 의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유(有)에도 치우치지 않고, 무(無)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은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면서도 그 사람에게 사랑을 받지 못할 경우 누구보다 그 대상을 증오한다. 또한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하면서도 자신에게 실망할 경우 자기 자신을 과도하게 비하한다. 붓다는 인간의 극단적인 경향을 여실히 보여주고 이러한 극단성을 경계하기 위해 중도를 강조하였다.
저자들은 유애와 무유애라는 인간의 극단적인 경향과 그 해결법인 중도에 대해 다양한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해석하려고 한다.
고전적 정신분석은 성적인 욕동과 공격적 욕동을 중심으로 정신 현상을 이해한다. 인간은 무의식 속에 억압되어 있는 엄청난 충동들을 깨달을 수 없고 충분히 조절하기 어렵다. 여러 이유로 욕동의 조절을 실패하면서 정동의 불안정이나 충동 조절의 어려움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이 심리적 고통의 원인이 된다.
Freud (1896)는 초기 욕동 이론에서 리비도를 욕동의 중심으로 보았고, 공격성은 단지 리비도 충족의 좌절로 인한 반응적인 표현으로 설명했다. 하지만 1920년대에 이중 욕동 이론을 도입하게 되는데, 공격성을 죽음 욕동으로 보면서 정신과정을 추진하는 기본적인 본능적 에너지의 원천으로서의 삶 욕동과 동등한 위치에 놓았다(Freud 1920). Freud의 이중 욕동 이론은, 처음부터 그 가설을 받아들인 Klein 학파를 제외하고는 여전히 많은 정신분석가들에게 매우 논쟁적인 이론으로 남아있다(Quinodoz 2005). 불교의 초기 이론인 사성제에서 성적인 욕동 및 공격적 욕동과 유사한 갈애를 설명하는 것은 Freud의 후기 정신분석 이론과 유사한 면이 있다. 정신분석에서는 욕동이 억압되거나 분출됨으로써 벌어지는 고통에 대해서 무의식적인 탐색과 치료상황에서의 전이와 저항을 통해 환자에게 통찰을 줌으로써 도움을 준다. 반면에 불교는 욕동 자체에 대한 문제로 바로 들어가 그 존재를 인식하게 한다. 불교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근본적 문제는 만족을 끊임없이 추구하면서 좌절에는 취약한 인간의 경향성이다. 그런 면에서 그 해결은 만족과 좌절 어느 쪽에도 흔들리지 않는 중도의 태도다. 이는 자아의 성숙과 조절을 강조하는 정신분석과 유사하나 차이점이 분명하다.
욕동에 대한 접근법에 있어서도 불교는 정신분석과 차이가 있다. 불교는 욕동 자체를 문제시하고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지만, 욕동이 인간이 에너지의 근본이면서 이를 잘 활용할 때 더 나은 삶을 위한 추동력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정신분석의 입장이 더욱 현실적이라 생각한다. 다만 유애, 무유애, 또는 어떤 형태이건 그 존재를 인식하고 받아들이라는 면은 유용한 개념이다.
자아 심리학에서 자아는 본능, 초자아, 그리고 외부 현실간의 갈등을 타협시키는 역할을 한다. 자아는 삶의 경험을 통해 세상을 적응해 나가고, 그 나름대로의 삶의 방식을 채택해 나간다. 자아의 삶의 방식은 나름대로 굳어진 평형상태로서 성격과 증상을 형성하게 되는데, 인간의 굳어진 평형상태가 깨지는 상황은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강력한 위협이 된다. 그런 측면에서 자아 심리학은 자아의 적응 기능을 중요시한다. 또한 인간 무의식의 욕동들을 해석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런 연상들을 억압하고, 왜곡하는, 그리고 절충하는 방어 작용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자아 심리학에서 인간의 고통은 취약한 자아 기능의 결과다. 자아를 중심으로 무의식적 욕동 및 현실과의 관계에서 자아가 타협을 실패할 때 인간은 고통을 겪게 된다.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욕구를 끊임없이 이루고자 한다. 정신 발달 및 생애 초기의 경험들을 통해 형성된 자아는 이러한 욕구들을 완전히 버리기 어려우며 이를 충족시키기 위한 나름대로의 타협 방식을 터득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타협 방식은 변화에 저항한다.
불교에서의 중도는 일종의 자아 조절 능력과 유사하다. 인간은 만족과 좌절이라는 욕구와 외부 현실 사이에서 나름대로의 타협점을 찾고, 이미 만들어진 방식을 벗어나기란 어렵다. 자아 심리학은 과거 경험과 초기 양육 관계로부터 만들어진 자아의 기능을 이해하고, 현재 삶에서 벌어지는 방어에 초점을 맞추어 환자로 하여금 통찰을 하고, 이를 기반으로 변화를 지향한다. 불교는 인간이 만족에 집착(유애)하거나 좌절에 분노(무유애)하는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그러한 감정에 매몰되지 않도록 하면서,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태도를 강조한다. 동시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무상의 가르침을 통해 외부 현실의 변화에 대한 인간 마음의 유연성을 키우도록 돕는다.
불교는 자아의 기능을 강화하고 현실에 적응해 나가는 능력을 향상시킨다는 측면에서 정신분석과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드러나는 차이점은 불교가 욕동 혹은 욕망이라는 존재를 먼저 전제하고 나서, 인간이 이를 인식하고 난 뒤에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한다는 점에서 치료 방향은 유사하지만 그 진행 순서는 다른 면이 있다.
Klein은 성적인 욕동과 공격적 욕동을 인간이 태어나면서 지니고 있으며 아기가 ‘좋고’ ‘나쁜’ 경험을 지각하는 방식으로 파악하였다(Mitchell과 Black 1995). 그리고 발달 단계의 개념을 편집-분열 자리(paranoid-schizoid position)에서 우울 자리(depressive position)로의 이동으로 설명하였다. 아이는 생후 초기에 실제 대상의 일부분인 부분 대상(partial object)만을 인식하는데 그 대상은 ‘전적으로 좋은 대상’이거나 ‘전적으로 나쁜 대상’이 된다. 이때 작동하는 방어기제가 분열(splitting)이다. 하지만 발달이 진행됨에 따라 대상의 좋은 측면과 나쁜 측면을 함께 인식하게 되고 전체적으로 바라보게 되면서 우울 자리로 교체되게 된다. Kernberg (1967)는 내재화된 좋은 대상관계와 내재화된 나쁜 대상관계가 분열된 상태에서 통합된 상태로 나아가는 것은 발달의 중요한 과제라고 하였다.
대상관계 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유애는 좋은 대상관계에만 집착하는 것으로, 무유애는 나쁜 대상관계에만 집착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기와 대상의 ‘좋음’과 ‘나쁨’을 통합하지 못하고 분열(splitting)을 통해 한쪽 특성만을 고집하는 경향은 편집-분열 자리의 특성이며, 편집-분열 자리를 넘어서 우울 자리로의 이동은 자기 혹은 대상의 양면성(兩面性)을 인식하는 것이다. 유애와 무유애는 우울 자리보다 편집-분열 자리가 더욱 우세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유애와 무유애는 인간이 세상의 양면성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거부하는 상태로 전체 대상이 아닌 부분 대상만을 인식하면서, 그 대상을 끊임없이 추구하거나, 반대로 끊임없는 공격성을 가지는 것이다. 중도는 무언가를 추구하거나 공격하고자 하는 극단적인 욕망 사이에서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위치에 서는 것이며, 대상관계 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자기와 대상의 좋은 측면과 나쁜 측면을 통합하고 전체 대상과의 관계성을 이룩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인간 내면의 편집-분열 자리는 만족과 좌절이라는 양극단적인 경험을 통해서 ‘좋음(good)’과 ‘나쁨(bad)’, ‘선악(善惡)’, ‘시비(是非)’를 구분하는 이분법적인 방식으로 작동한다. Lee (2002)는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 밑에서 선악의 구분이 분열과 투사의 기제를 일으키는데, 불교에서는 그러한 분별지(分別智) 자체를 미혹된 상태로 간주하는 경향이 높다고 하였다. 중도가 좋고 나쁨이라는 편집-분열 자리의 이분법적 경향을 벗어나 우울 자리로의 완전한 이동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정신분석과 유사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Kohut (1971)은 자기애적 욕구를 인간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다고 보았다. 양육자와 상호작용하는 아이는 두 가지 주요한 자기애적 노선을 가지는데, 선천적으로 힘과 안정을 추구하는 과대자기(grandiose self)와 양육자들에게 전능함과 완벽함을 귀속하며 생기는 이상화된 부모 이마고(idealized parental imago)이다. 생애 초기에 이러한 자기애적 노선이 적절히 충족되지 못하면 자기애는 취약해진다. Kohut (1971)은 아기가 어린 시절 진정한 공감이 결여된 상태로 부모의 요구에 맞추어 자기를 형성해 나갈 경우, 겉보기에 자신만만하고 오만한 모습을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기 자신의 진짜 모습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느낌으로 우울감과 공허감을 갖게 된다고 했다.
불교에서는 개개인의 사정을 떠나 인간은 모두 고통스러운 존재이며, 존재론적인 불안정감을 갖고 있다고 본다(Epstein 1996). Epstein (2007)은 모든 인간이 자기애적인 완벽한 상태에 대한 갈망을 하면서도 불완전한 느낌, 공허감 또는 무가치하다는 느낌으로 괴로움을 겪는다고 하였다. 결국 좋은 양육자가 있든 없든 모든 인간은 불안정할 수밖에 없고, 어느 정도 충족되지 못한 자기애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Freud (1920)도 유아기에 경험하는 사랑의 상실과 실패는 자기애적 상처의 형태로 인간의 자존심에 영원한 상처를 남긴다고 하였다.
유애와 무유애는 아동기의 자기애적 상처를 보상하기 위한 과도한 자기애 및 이상화된 타인에 대한 추구와 자기애적 좌절 사이에서 고통을 받는 인간의 극단적인 경향과 유사하다. 자기애적 좌절은 공허감 혹은 자기애적 분노로 나타날 수 있다. 불교는 이러한 극단성 사이에서 휘둘리지 않도록 중도의 태도를 강조하면서 인간이 자신과 세계 안에 내재하는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을 근본적인 차원에서 직면하고 수용하는 방식으로 이끈다(Epstein 1996). 더 나아가 자기라는 개념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을 시도하는데, 결국 자기에 대한 모든 개념은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자기를 보상하기 위해 잠정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파악하는 것이다(Kim과 Ha 2021). 반면에 자기 심리학은 취약한 자기로부터 건강한 자기로의 변화를 추구하고, 생애 초기 발달 과정에서의 결핍(deficit)에 대해 치료자의 공감을 강조하고 치료자의 해석을 통해 정지(arrest)된 정신 내적 세계의 발달을 다시 도모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불교에서는 모든 고통이 무상과 무아로 인해 발생하며, 이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또한 고통의 원인이 되는 갈애를 없애야 하고, 그 방법으로 중도를 제시한다.
불교 사상에서 고통(苦)을 해결하는 방법 중의 하나로 알아차림(mindfulness) 명상이 있다. 알아차림은 생각과 느낌을 포함한 경험의 모든 영역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고 알아차리라고 일깨운다. 다시 말해, 알아차림은 우리에게 스스로를 생각과 동일시하지 말고, 생각과 한데 섞이지 말고, 그 생각의 과정을 알아차리고, 생각의 생겨남과 사라짐의 패턴에 주목하도록 하는 것이다. Kabat-Zinn (2006)은 ‘이 순간에, 어떤 판단도 하지 않고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알아차림이라고 하였다.
저자들은 불교의 사성제와 중도 그리고 알아차림을 통해서 정신분석이나 정신치료에서 받아들일 만한 부분이 있는지에 대해서 치료자 측면과 환자 측면으로 나누어 생각해볼 것이며, 한계점도 함께 논의해보고자 한다.
Freud (1912)는 ‘evenly hovering attention’, ‘evenly suspended attention’이라는 개념을 통해 치료자가 환자의 말과 치료자 자신의 반응 모두에 열려 있고, 수용적이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했다. 또한 Bion (1970)은 ‘to listen without memory, desire or understanding’이라는 개념에서 치료자는 환자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예상이나 치료 중에 무엇이 일어나야 한다는 기대 없이 환자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했다. Freud와 Bion의 치료자가 가져야할 태도에 대한 이야기는 치료와 환자에게 열려 있고, 수용적인 자세를 유지해야하는 것으로 유사하게 해석할 수 있다(Rubin 2009). 정신분석에서는 분석가 측이 적당한 거리를 둔 채 주의를 집중함으로써 환자의 자유연상을 가능케 하고, 중요한 내적 갈등이 표면에 떠오르게 한다. 이것은 알아차림 명상 중 떠오르는 것들에 대해 마음을 챙겨 알아차리는 과정과 놀랍도록 유사하다(Kostner 2015). 정신분석에서 진정한 의미의 개방적 중립성, 즉 어떠한 판단이나 특정한 의도 없이 귀 기울여 듣는 분석가의 태도는 정신분석이 시작된 이래 가장 중요한 핵심 요소이다(Freud 1912). Rubin (1996)은 불교 명상이 정신분석적 경청에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분석가의 집중에 대한 역량을 향상시킬 수 있기 때문에 정신분석가에게 명상을 추천하기도 했다. 따라서 정신치료자의 측면에서도 알아차림 명상은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정신분석에서 환자가 자신의 무의식을 탐색하고 전이 현상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또한 이러한 과정은 치료자와의 관계, 치료자의 해석 등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런 측면에서 명상 중인 수행자는 정신치료의 치료자와 환자의 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Kim 2016). Epstein (2013)은 Winnicott의 ‘안아주는 환경(holding environment)’ 의 과정이 명상과 비슷하다고 설명한다. 아기와 하나가 되는 엄마처럼 마음은 그 본질 상 고통을 수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치료 현장에서 환자는 아기가 부모를 이용하는 것처럼 치료자를 환자 자신의 자아를 보호해주는 사람으로 여기고 행동하는데, 명상은 명상하는 사람의 ‘관찰하는 자아(observing ego)’가 치료자가 되고, ‘상처받은 자아’가 환자가 된다. 따라서 환자로 하여금 자신의 상처받은 자아를 품을 수 있는 자신감과 치료의 확신을 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정신치료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불교의 수행법 중 하나인 위빠사나(Vipassana) 명상은 ‘관조(觀照)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관조’는 판단하지 않음을 전제로 한다. 불교는 ‘좋음’과 ‘나쁨’을 판단하는 것을 넘어서는 완전한 비판단의 단계까지 올라간다. 인간은 자신과 대상에 대한 호불호(好不好)를 따지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고통은 결국 비판단의 단계로 올라서야 극복될 수 있다. 어떤 대상이나 상황에 대해서 호불호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완벽하게 없앨 수는 없기에 불교에서 말하는 비판단적 태도는 현실적으로 어려워 보이지만, 환자의 마음이 어느 극단에 있는지를 함께 확인하고 비판단적으로 인식하도록 하는 것이 정신치료 과정에서 도움이 될 것이다.
모든 인간은 고통스럽다는 고성제는 고통의 보편성을 일깨워준다. 고통의 보편성을 이해하면서 고통을 자기와 동떨어지도록 객관화하는 것은 자신의 고통을 바라볼 수 있는 힘을 더욱 키운다. 고통을 느끼는 인간은 고통 자체가 자신인 것처럼, 자신이 고통인 것처럼 행동한다. ‘괴로움은 존재하지만 괴로움을 느끼는 자는 없다’라는 1500년 전의 붓다고사의 말은 고통을 완전히 객관화함으로써 고통으로부터 고통을 받지 않는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고통만 객관화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self)라는 것은 오온에 의해 구성된 일시적인 존재이므로, 고통을 느끼는 자기는 원래부터 없으며, 인간으로 하여금 고통과 자기를 동일시하지 않도록 도와준다. ‘무아’는 자기가 믿고 있는 자기(self) 다시 말해, ‘자기-정의(self-definition)’에도 의심을 만듦으로써, 자기를 완전히 객관화시킨다. 이러한 자기 균열은 부정적인 측면이 아닌, 관찰하는 자아(observing ego)를 생성하고 확장시킬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는 정신치료에서 환자가 통찰이 생김에 따라 관찰하는 자아를 키우고 자아의 기능을 확장시키는 것과 유사하다.
정신과를 찾아오는 환자는 불안정한 정신 내적 상태로 인해 고통을 받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환자의 불안정한 상태는 불확실한 인생에서 확실하고 안정감을 찾고 싶어하는 환자의 무의식적 욕구에서 발생한다. 치료자가 환자에게 일시적인 안정과 정신적인 발달을 도와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영원하고 확실한 안정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은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일시적인 안정은 언제든지 깨질 수 있다. 인생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언제든 고통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있다. 인생은 결국 모험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불안정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확실한 안정을 찾는 유일한 길이다. 불교의 무상과 무아의 가르침은 영원한 안정을 찾으려 할수록 오히려 불안정해진다고 하면서, 현실의 불안정을 수용할 수 있도록 돕는다. 불교적 관점을 정신치료 과정에 도입한다면 적절한 시기에 환자로 하여금 변화무쌍한 인생과 세상에 대한 이해를 만들어주고, 불안정감을 수용하는 태도를 키우도록 돕는 것이 치료와 변화의 목적의 하나가 될 것이다.
인간의 고통에 대한 원인인 갈애가 본성적으로 내재된 욕동이라는 접근은 불교와 정신분석의 유사한 측면을 나타낸다. 하지만 치료적 목표에서는 차이가 있다. 정신분석에서는 욕동을 자아가 적절히 타협하고 조절해야 하는 대상으로 소멸시킬 수 없는 정신 에너지의 근본으로 바라보는데 반해 불교는 욕망 자체를 완전히 없애는 것을 추구한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불교는 실현 불가능한 이상적인 결말을 추구하고 있으며, 이에 반해 정신치료는 실현 가능성을 중요시하면서 현실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저자들은 욕동과 갈애가 제거 가능한지 여부에 따라 둘을 완전히 다른 개념으로 파악하기 보다는 둘의 유사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불교가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종교적인 측면을 분명히 가지고 있고, 따라서 갈애를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을 종교적인 차원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2000년 이상의 차이를 두고 탄생한 불교와 정신분석의 두 흐름이 완전히 일치하기를 바라기는 어려우며,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완전히 다른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앞으로 논의할 수 있는 다양한 발전 가능성을 놓칠 수 있다.
불교는 멸성제에서 인간의 고통과 욕망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다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 이러한 부분에서 불교는 정신분석과 표면적으로는 궤를 달리하고 종교적인 영역으로 편입될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다. 또한 대상관계 이론의 측면에서 갈애를 인생에서 지속되는 편집-분열자리의 경향이라고 보더라도, 편집-분열자리의 완전한 소멸은 불가능해 보인다. 따라서 저자들은 고통이나 고통의 원인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다는 붓다의 선언은 단지 선언으로서의 의미가 있다고 보며 실제로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불교에서 갈애를 멸하고, 극단성을 경계하는 방법으로 중도를 강조하는 부분에서 접점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갈애를 멸할 수 있다는 붓다의 선언은 어쩌면 중도가 갖춰진 삶을 이상적으로 비유한 것이다. 따라서 불교가 종교의 영역에 속해있는 만큼 멸성제에서 말하는 고통과 고통의 원인의 소멸은 하나의 이상적 종교적인 교리로 이해함과 동시에 치료를 위한 방향성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이 적절하다.
결론붓다가 깨달은 직후 설한 설법에서 사성제를 통해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에 대해 말한 만큼, 고는 불교에서 핵심적인 주제이다. 저자들은 1부 논문에서 고성제의 각각의 고통에 대해 정신분석적인 관점에서 해석해보았고, 2부에서는 고통의 원인인 집성제와 정신치료적 고려에 대해서 다루어 보았다.
불교는 고통의 원인을 갈애라고 하였고, 갈애는 욕애, 유애 그리고 무유애 세가지로 나뉘어진다. 욕애는 정신분석에서 쾌락원칙과 유사하며, 유애는 성적인 욕동, 무유애는 공격적 욕동과 유사점을 보인다. 갈애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이라는 점에서 정신분석에서의 욕동 개념과 많은 부분이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해결방법에 있어서 불교는 갈애 혹은 욕동을 없애야 한다고 하지만, 정신분석에서는 욕동은 없앨 수 없는 고정된 것이며, 이를 자아가 잘 조절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였다.
불교는 유애와 무유애를 통해 인간의 극단적인 경향을 보여준다. 불교는 이를 경계하기 위해 중도를 지킬 것을 권고하는데, 극단성과 중도에 대해서 다양한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유사점을 보였고, 이중 욕동 이론, 편집-분열자리, 자기애와 비교 분석해 보았다.
비록 정신분석이 개인의 과거 경험으로부터 현재를 이해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불교가 무상과 무아를 통찰하면서 존재론적인 현실을 직시한다는 점에서 해결 방법의 차이가 있지만, 인간 내면의 욕망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작용을이해함으로써 치료적 효과를 노린다는 데 있어서 유사점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고정된 자기를 완전히 부정하고, 자기에 대한 개념화와 동일시를 거부하는 무아의 개념은 정신분석과 불교의 최종 목표에 있어서의 차이점을 드러내지만 이 또한 인간에게 내재된 욕망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정신분석과 불교의 유사점을 보인다.
본 논문은 불교에서의 고와 중도, 그리고 알아차림 명상을 통해서 정신치료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도 논하였다. 먼저 치료자는 환자의 이야기에 열려 있고 수용적인 태도를 취해야하는 만큼 명상을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또한 환자로 하여금 본인 스스로의 치료자가 될 수 있도록 자신감을 북돋아주고, 비판단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고통을 객관화하는 것을 함양해주는 방식으로 궁극에는 불안정을 수용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고 보았다.
불교와 정신분석은 각자의 역사에 비해 현재 시점에서 많은 교류가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최근 서양 심리학계에서는 심리치료에 불교심리학적 요소의 도입을 시도하고 있지만, 불교의 사상들이 서양 심리학의 관점에서 재해석되었다는 한계점이 있으며, 사성제, 삼법인 그리고 중도와 같은 불교의 기본 교리에 대한 연구는 많이 부족한 실정이다.
저자들은 총 2부로 구성된 본 논문을 통해서 불교의 사성제를 포함한 기본 교리를 정신분석과 함께 비교해보고자 하였다. 앞으로도 두 분야에서 많은 학문적 교류가 이루어지고 서로 상호 보완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생겨나길 바란다.
None
The authors have no potential conflicts of interest to disclose.
Conceptualization: Jee Hyun Ha, Hyeong Hoon Kim. Data cuation: Hyeong Hoon Kim. Formal analysis: Jee Hyun Ha. Investigation: Jee Hyun Ha, Hyeong Hoon Kim. Methodology: Jee Hyun Ha. Project administration: Jee Hyun Ha. Resources: Jee Hyun Ha, Hyeong Hoon Kim. Supervision: Jee Hyun Ha. Validation: Jee Hyun Ha. Visualization: Jee Hyun Ha. Writing—original draft: Hyeong Hoon Kim. Writing—review & editing: Jee Hyun H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