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강(1970~)은 한국을 대표하는 소설가이다. 그는 1994년 「붉은 닻」으로 등단을 한 후 소설집 『여수의 사랑』, 『내 여자의 열매』, 『노랑무늬영원』과 장편 소설 『검은 사슴』, 『채식주의자』, 『희랍어 수업』, 『소년이 온다』, 『흰』 등을 차례로 집필하였다. 또한 『채식주의자』는 2016년 세계에서 권위 있는 문학상인 맨부커 상(Man Booker Prize)을 받음으로써 대중에게 각인되었다. 그의 소설은 전반적으로 암울하며 난해하다. 주인공들은 대부분 깊은 심리적인 상처를 받았으며 실제 정신과의 임상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증상들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특히 『채식주의자』는 중편 소설 3편을 엮은 것으로, 주인공 영혜는 각 소설마다 단계적으로 악화되는 정신과적인 증상을 보이며 충격적인 결말을 맞이한다. 주인공이 자신을 나무로 느끼며 죽어가는 장면은 이성의 시각에서 이해가 되지 않으며, 소설 전통의 플롯을 무시하는 듯한 작가의 자의적인 이야기 구조는 그 난해함을 배가한다.
저자가 이 논문을 쓰게 된 동기는 『채식주의자』 주인공의 점증되어 가는 심리적인 증상을 임상에서 경험하는 무의식적인 논리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 시작되었다. 육식을 거부하면서 파국적인 결말로 향하는 이야기의 흐름에서 중층의 무의식적 요소가 응축되거나 내포되었다고 여겼고, 작가 역시 이러한 가정을 설명하듯 내러티브의 흐름을 주로 꿈과 백일몽, 자기 독백이나 제3자의 자세한 관찰을 통해 이끌어 나갔다. 언뜻 보기엔 마조히즘의 극단으로 이해되는 주인공의 파괴적인 증상은 그가 비교적 최근에 적은 『흰』을 보며 변화하게 되었다. 몇 가지 인상적인 내용을 아래에 짧게 예시한다(Han 2016).
<인용문 1>
흰 것에 대해 쓰겠다고 결심한 봄에 내가 처음 한 일은 목록을 만드는 것이었다. 강보, 배내옷, 소금, 눈, 얼음, 달, 쌀, 파도, 백목련… 한 단어씩 적어갈 때마다 이상하게 마음이 흔들렸다. 이 책을 꼭 완성하고 싶다고, 이것을 쓰는 과정이 무엇인가를 변화시켜줄 것 같다고 느꼈다. 환부에 바를 흰 연고, 거기 덮을 흰 거즈 같은 무엇인가가 필요했다고.
… 두 달 가까이 시간이 더 흘러 추워지기 시작한 밤, 익숙하고도 지독한 친구 같은 편두통 때문에 물 한 컵을 데워 알약들을 삼키다가 (담담하게) 깨달았다. 어딘가로 숨는다는 것은 어차피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 특별히 우리가 용감해서가 아니라 그것밖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도 그 위태로움을 나는 느낀다. 아직 살아보지 않은 시간 속으로, 쓰지 않는 책 속으로 무모하게 걸어 들어간다.
소설가 한강은 단순히 개인과 사회의 폭력에 반응하는 한 개인의 마조히즘을 어둠의 언어로 분출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삶과 텍스트가 향하는 지점이 위 인용문에서 말한 것처럼 바로 ‘흰’색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저자는 다소 현기증을 느꼈는데, 작가가 밀어붙였던 극단적인 증상이 어떻게 흰색으로 변화되거나 섞일 수 있을까라는 의문 때문이었다. 또한 작가는 위 인용문에서 언급했듯이 고통은 피할 수 없다는 것과 글로써 그 내면의 고통과 상처를 그대로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는 마치 정신분석의 임상에서 증상의 호전을 위해 무의식적인 저항을 통과해야 한다는 치료의 공식을 작가가 소설로 실현하지 않았을까라는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작가의 글은 내용의 전달에 국한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러하겠지만 특히 한강의 텍스트는 독자로 하여금 감정의 톤을 그대로 느끼게 하여 인물이 느끼는 상처와 고통을 그대로 전달해 준다. 이러한 작가의 언어는 실제 임상에서 경험하는 갈등과 결핍으로 인한 무의식적 고통 및 저항을 소설에서도 느낄 수 있지 않을까라는 또 다른 기대감을 가지게 한다.
이러한 의문과 기대감들 때문에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세울 수 있었다. 한강의 소설들은 피분석자가 분석가에게 말을 하듯 그의 소설 속 분신인 인물들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사회, 즉 담론의 공간에) 이야기하는 것이며, 그러한 과정을 통해 피분석자가 자신의 무의식을 이해하듯 작가 자신의 내면을 통합하며 알아간다는 것이다.
많은 근거가 필요한 위 가설은 저자가 소설가 한강을 전반적으로 분석함에 있어 큰 부담감이자 동기가 되었다. 일단 그의 소설을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다시 읽어야 했으며 각 책들의 무의식적 의미를 시간의 순으로 재정의해야 했다. 개략적이지만 저자가 그리는 큰 흐름은 장편 소설의 순서에 따르며, 단편 소설들은 작가 삶 부분에서 작가의 무의식의 단면을 나타낸다고 가정해야 했다. 즉, 장편 소설은 중요한 대상과의 깊은 갈등이나 결핍, 또는 그 해결을 적은 것이며, 단편 소설은 이와 관련된 조각난 꿈, 백일몽 및 연상에 대한 무의식적인 다양한 실험인 것이다. 이는 그가 그의 단편 및 장편 소설에 대하여 설명한 인터뷰의 내용과 대체적으로 상응한다(Kim 2018).
<인용문 2>
… 단편 소설은 좀 더 개인적인 것입니다. 삶이 저라는 인간을 흔들거나 베고 지나가거나 지금 지나가고 있는 그 자리의 감각과 생각과 감정을 씁니다. … 인간에 대한 질문들을 끈질기게, 전심전력으로 들여다봐야 하는 게 장편 소설입니다. 단편은 개별 장들처럼 전체 구도 속에서 계획된 어떤 게 아니고, 저라는 인간이 여기까지 (때로는 기어서, 때로는 꿋꿋하게 걸어서, 때로는 어둠 속을 겨우 더듬어서) 살아온 기록입니다. …
저자는 작가의 주요 장편 소설을 중심 축으로 여기고, 그 시기 단편 소설들은 큰 물결의 지류로 다양하게 연결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 연결 지점은 의식의 흐름뿐 아니라무의식적인 역동과 발달이 큰 역할을 할 것이라는 가정을하였다. 이러한 가정 아래 우선 그의 장편 소설을 시간의 순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초판 출판 연도를 기준하였다).
『검은 사슴, 1998』, 『그대의 차가운 손, 2002』, 『채식주의자, 2002~2007』, 『바람이 분다 가라, 2010』, 『희랍어 시간, 2011』, 『소년이 온다, 2014』, 『흰, 2016』.
저자가 가정하는 위 장편 소설의 흐름에서 『채식주의자』는 증상의 악화가 정점으로 치닫는 시기다. 이번 논문에서 분석하고자 하는 단편 소설 「내 여자의 열매」는 『채식주의자』 연작이 쓰여지기 전인 1997년에 출판되었다. 또한 이 소설이 작가가 직접 밝혔듯 『채식주의자』의 원형이 되는 작품이라는 점은 그 시기 단편 소설 중에서 그의 내면의 어둠에 대한 무의식적인 실험의 극단으로 여겨진다. 짧게 쓰여진 만큼 증상의 응축과 변화가 심한 이 단편 소설이 다른 단편 소설과는 다르게 그 모티프가 장편 『채식주의자』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작가의 무의식의 발달에 중요한 지점에 있음을 암시한다. 저자의 관점으로는 장편 『채식주의자』는 「내 여자의 열매」의 심한 응축과 급격한 증상의 변화를 실험적으로 나누어 그 각각의 과정을 무의식적인 논리로 밝힌 것뿐이다.
저자는 무의식적인 관점으로 한강의 소설을 분석하기 위해 세가지 방법의 틀-내용(contents), 텍스트(text), 플롯(plot)-을 적용하고 유지할 것이다. 첫째, 분석의 방법으로써 내용(contents)은 환자를 분석하면서 구축한 무의식의 이론을 예술과 문학에 적용한 프로이트의 경험을 기원으로 한다. 작가들의 무의식적 갈등이나 상처, 결핍 등이 작품 형성에 중요한 원인이라는 가정하에 환자의 증상을 분석하듯 예술을 분석하는 방법은 프로이트 이후 병적학(pathography)으로 발전하여 무의식 미학의 큰 축을 담당하였다(Spitz 1985). 이 방법은 한강의 소설 분석에 특히 유효하다. 그의 소설의 인물들은 대부분 깊은 상처와 결핍을 보이며, 꿈이나 백일몽, 여러 정신과적인 증상으로 자신의 상태를 나타낸다. 본 논문에서 다루는 「내 여자의 열매」는 병적학적 방법을 주로 분석의 도구로 사용할 것이다.
두 번째, 텍스트(text)는 다른 분야에서 사용되는 정의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저자의 논문에서 제시하는 텍스트의 의미는 작가가 사용하는 언어의 내면적 층위를 의미하며, 작가의 묘사력에 의지한다. 즉, 이는 문장 자체에서 느껴지는 내적 에너지와 긴장, 강박, 저항, 욕구로 이해될 수 있다(Brooks 1992). 이는 한강 작가가 『채식주의자』의 영어 번역자에게 강조한 ‘언어의 감정과 톤’의 맥락과 유사하다. 소설가는 언어로 내면 세계를 단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의 순간을 독자가 실감나게 느끼게 해주는 능력이 있는 것 같은데, 이것은 회화에서 보이는 화가들의 양식(form/style)과 비슷할 수 있다.
세 번째, 플롯(plot)은 내러티브(narrative)의 구조이자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형성하는 역동과 논리이다(Brooks 1992). 플롯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B.C 322)의 『시학』이 학문적인 기원이며, 이 형식의 힘은 역사적으로 담론의 공간에 견고한 틀을 제공하였다. 백일몽은 소설가가 창조하는 이야기의 근원으로 이해되고 있으며(Freud 1908), 그 백일몽이 어떤 플롯으로 이야기로 완성되는지는 시대의 유산 및 작가의 고유한 역량인 듯하다. 한강의 소설 전반에서 보이는 플롯은 기저에 흐르는 무의식적인 힘을 추진력으로 정신과적인 여러 증상과 이에 대한 다양한 결과로 진행된다. 「내 여자의 열매」 역시 증상의 급격한 악화 및 증상의 기저에 흐르는 무의식의 힘과 흐름이 내러티브의 주된 플롯으로 이해될 것이다.
위 세 가지 분석적인 틀은 저자가 임상에서 적용하는 무의식에 대한 몇 가지 주요 이론을 기반으로 한다. 이는 이전 논문에서 저자가 예술을 분석하면서 적용했던 프로이트의 구조이론(structural theory)과 대상관계 이론이다(Lee와 Yoon 2019). 특히 무의식으로 이해하는 소설가 한강의 무의식적인 미학은 비온의 이론(Bion 2018)과 여러 지점에서 닿아 있는 듯하다. 덧붙여 한강의 소설 인물들이 나타내는 여러 정신과적 증상의 형성은 자아심리학 이론을 심화, 발전시킨 브레너의 이론(Brenner 1982)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본 논문은 브레너의 주요 이론을 기본적인 축으로 증상 및 여러 심리적 현상을 설명할 계획이다.
한강은 자신의 삶의 시간에 반응하여 끈질기고 진지하게 작품들을 완성시켜 왔다. 본 논문이 다룰 「내 여자의 열매」는 그의 긴 흐름의 소설들 중에서 증상의 고통이 극한의 지점까지 이른 상태이다. 저자는 소설 「내 여자의 열매」를 분석하기 앞서 임상에서 이런 심각한 증상을 가진 환자를 처음 대면했을 때를 상상하려 한다. 그리고 본론은 그 증상의 원인을 그의 단편 소설들에서 나타나는 무의식적인 요인을 분석하여 그 요소들이 증상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 가정하고 설명하려고 한다.
「내 여자의 열매」는 한 여자의 몸에 멍이 퍼져 결국 나무가된다는 단순하지만 충격적인 이야기다. 아내의 독백 같은하나의 내러티브를 제외하고 내러티브의 화자는 대부분 남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우선 남편의 시각을 빌려 아내를 관찰하고 설명하려 한다.
언뜻 보기에 평범한 가정이다. 18평 서민 아파트 13층에서 살아가는 부부로 남편은 과거 외로웠지만 직장에 충실하면서 아무일 없는 듯 3년을 만족하며 살아간다. 아내는 가정에서 남편의 기본적인 요구에 조용하게 잘 따르며 살아왔다. 이야기 사건의 시작은 아내가 늦은 오월 자신의 몸에서 피멍을 보여준 이후였다. “병원을 가 볼까”라는 아내의 걱정에 아내가 산만하여 부지불식중에 넘어진 줄 알고 ‘그지없이 한심하고 가엽고 서글퍼서’ 오랜만에 아내의 몸을 안아 준다. 여름 가까이 돼서야 아내는 악화된 자신의 몸의 멍을 다시 보여준다. 멍은 더 커지고 둔탁한 녹색으로 변했으며 진해졌다. 남편은 이제야 아내의 얼굴이 푸르스름해졌으며 윤기 있던 머리카락이 시래기처럼 푸석푸석해졌음을 깨닫는다. 아내는 햇빛만 보면 벗고 싶고 배도 고프지 않다고 고백한다. 또한 물을 많이 마시고 구토를 많이 한다고 자신의 고통을 말하며 운다. 남편은 아내에게 핀잔을 주며 병원에 가 보라고 한다. 남편은 이 시점에 아내와 결혼을 결심했던 시기를 기억한다. 남편은 아내가 결혼 전 한국을 떠나 자유롭게 살기 원했던 모습과 주변 차들로 시끄럽고 답답한 아파트에 입주하기 싫어했던 모습을 ‘비현실적이고 낭만적인’ 몽상으로 치부하고, 자신과 “아무래도 헤어질 수가 없어서” 남편의 뜻에 순종했던 아내의 모습에 자부심을 가졌었다. 남편의 꿈인 베란다에서 화초 키우기는 결혼 초부터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다 실패하였다. 피부에 멍이 심해진 아내는 정성을 다했지만 자라지 않은 황량한 화분을 보고 이 더럽고 시끄러우며 답답한 공간에 자랄 리가 없다고 ‘적의에 차서’ 이야기한다. 남편은 오히려 자신의 아슬아슬한 행복을 깨는 아내에게 물을 뿌리면서 “뭐가 그렇게 시끄러운 거야”라며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른다. 아내는 이후 말이 거의 없어지고 점점 더 삶의 생기를 잃어 가며 몸의 멍은 넓어지고 깊어졌다. 남편은 종합병원에 가 보라고 강권하지만 자신은 바빠서 같이 갈 수 없고, 오히려 자신의 건강은 자신이 챙겨야 된다고 말한다. 더욱이 아내가 싫어하는 장모를 부른다고 하며 ‘자신의 말을 들으라’ 명령을 한다. 이 사건 이후 남편이 출장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살림은 거의 하지 않고 몸이 거의 나무로 변해 햇빛을 향해 있는 아내를 발견한다. 메말라 물을 요구하는 아내에게 남편이 물을 가득 주었을 때 아내의 몸은 찬란한 초록빛으로 변한다. 남편은 그런 아내의 모습을 보고 ‘저만큼 아름다웠던 적은 없었다’고 말한다. 이후 남편은 나무가 된 아내를 큰 화분에 옮겨 키운다. 그해 가을이 되어 나무는 석류와 같은 자잘한 열매를 맺게 되고, 남편은 그 열매의 맛도 보고 옆 작은 화분들에 분양한다. 점점 말라가는 나무가 된 아내를 보며 남편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며 소설은 끝을 맺는다.
봄이 오면 아내가 다시 돋아날까. 아내의 꽃이 붉게 피어날까. 나는 그것을 알 수 없었다.
남편의 내러티브를 언뜻 보면, 3년간의 평화롭고 만족스러운 결혼 생활을 하다가 5월 초 늦은 봄에 아내의 몸에 멍이드는 신체적인 증상이 시작되었고, 여름 즈음에 악화되어결국 가을에 나무가 되어 버린 이상한 이야기가 몇 개월 사이에 급격하게 진행이 된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남편의 내러티브의 설명과 관찰을 자세히 보면 증상의 발병과 악화는 결혼 전부터 서서히 시작된 된 듯하다. 소설 전체에서 남편에 의한 네 번의 심리적인 좌절이 보이고, 이 에피소드들은 증상의 발병 및 악화를 동반하였다. 이러한 시각으로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결혼 전부터 이 나라를 떠나 자유롭게 살고 싶어 돈을 모았던 아내는 자신 안에 있는 ‘나쁜 피를 갈고 싶다’는 말로 진심을 표현했지만 결국 그 돈을 결혼 비용과 전세 자금에 포함시켰고, 남편은 그 돈으로 아내가 싫어하는 시끄럽고 답답한 아파트를 굳이 고집하여 구입하였다. 이 시기부터 아내는 잔병이 많았고 어려 보였던 얼굴은 서서히 나이가 들어 보였으며 종종 베란다에 ‘시든 배춧잎’ 처럼 질주하는 차들을 무기력하게 보고 있었다. 이는 첫 번째 만성적인 심리적 좌절이다. 이러한 남편 중심의 공간에서 축적된 심리적인 고통은 몸에 서서히 멍으로 나타났고, 사건이일어나는 늦은 봄에 아내는 비로소 용기를 내어 자신의몸을 보여주면서 병원에 가는 것을 물어본다. 남편은 아내의 증상을 아내의 부주의 탓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이는 두 번째 좌절로서, 멍은 악화된다. 시간이 지나 옷으로 숨길 수 없었던 멍을 남편에게 보이게 되고 남편의 권유로 병원에 가게 되지만 의학적인 검사에서 이상이 없었고 이를 남편에게 이야기한다. 심리적인 퇴행과 피부 증상이 악화되는 상황에서 아내는 자신과 동일시된 식물들이 ‘시끄럽고 답답한’ 공간에서 잘 자랄 수 없다고 분노를 표현한다. 하지만 자신의 행복을 깨는 아내에게 “뭐가 그렇게 시끄럽다는 거야”라며 남편은 오히려 화를 내며 손바닥에 받은 빗물을 아내에게 끼얹는다. 이후 아내는 거의 말이 없어진다. 이 에피소드는 세 번째 좌절로 아내는 자신의 깊은 고통을 화를 내며 표현했지만 오히려 분노로 되받는 경우이다. 이후 증상은 더 악화되었고, 이를 본 남편은 장모와 함께 종합병원을 가라고 명령하였는데, 이는 네 번째 좌절로 이해된다. 마침내 아내는 더욱 퇴행하고 증상은 악화되어 살림 등 일상을 유지하지 못하고 온 몸이 나무로 변하여 더 이상 되돌릴 수 없게 된다.
남편의 문제는 아내의 심리적인 고통에 관심이 없고, 자신의 외로움을 채우거나 평화로운 일상을 유지하는 도구로 아내를 여긴다는 것이다. 이러한 남편은 ‘공감이 없는 자기 중심적인’ 인물의 설정인 듯한데, 사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회에 적응된 남성성이라 아내의 기괴한 증상의 원인으로 지목하기엔 다소 의아한 부분도 있다. 하지만 작가의 이런 설정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이런 남편의 설정을 통해 이사회 구조에서 용인되는 표피적인 남편의 모습과 동시에아내를 소설과 같이 만들 수 있는 또 다른 남편이 공존할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하는 것 같다.
나무가 된 상태에서 아내는 보이지 않는 어머니에게 자신 의 말을 읊조리듯 한다. 아내의 내러티브는 마치 피분석자가 ‘자유연상’을 하는 것처럼 자신의 내면을 가상의 어머니에게 표현한다. 이러한 설정은 남편의 내러티브에서 배제된 아내의 이야기로 이해된다. 또한 자신의 의견과 감정을 몇 번 밝히지만 번번이 거절을 당하는 모습에서 남편 중심으로 굳어진 담론 공간, 즉 가부장적인 공간에 아내의 감정과 사고가 진입하지 못함을 설명한다.
아내는 어머니를 대상으로 한 독백을 통해 몇 가지 의미 있는 자신의 이야기를 밝힌다. 첫째, 자신은 ‘바람과 햇빛과 물만으로 살 수 있는’ 나무가 되길 바랐다고 말한다. 이 소망은 반복된 꿈으로 구체적으로 표현된다(Han 2018b).
<인용문 3>
어머니, 자꾸만 같은 꿈을 꾸어요. 내 키가 미루나무만큼 드높게 자라나는 꿈을요. 베란다 천장을 뚫고 윗집 베란다를 지나, 십오 층, 십육 층을 지나 옥상 위까지 콘크리트와 철근을 뚫고 막뻗어 올라가는 거예요. 아아, 그 생장점 끝에서 흰 애벌레 같은 꽃이 꼬물꼬물 피어나는 거예요. 터질 듯 팽팽한 물관 가득 맑은 물을 퍼올리며, 온 가지를 힘껏 벌리고 가슴으로 하늘을 밀어 올리는 거예요. 그렇게 이 집을 떠나는 거예요. 어머니. 밤마다 그 꿈을 꾸어요.
여러 가지 무의식적인 의미가 내포된 이 꿈에서 아내는 문명을 상징하는 답답한 아파트를 뚫고 지나가는 나무가 되길 소망하고, 동시에 그 ‘가지를 힘껏 벌려 가슴으로 하늘을 밀어 올리고’ 싶어 하며, 이러한 소망을 통해 자신의 집을 떠나고 싶어한다.
둘째,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지만 ‘한번도 행복하지 않았던’ 고향에서의 기억을 말한다. 어머니처럼 바닷가 빈촌에서 살다가 죽을 운명이 될까 봐 열일곱 살 때 가출을 하였고, 지우고 싶지만 혼령처럼 옥죄는 과거의 기억을 힘들어했다고 고백한다. 아내는 어릴 때 느꼈던 고통스러운 경험과 분노의 기억을 다음과 같이 실감나게 표현한다(Han 2018b).
<인용문 4>
… 나는 언제나 달아나고만 싶었어요. 울부짖고 싶었어요. 세상에서 가장 착한 얼굴을 하고 버스 뒷자석에 웅크리고 앉아, 어머니, 주먹으로 유리창을 박살내고 싶었어요. 내 손등에 흐르는 피를 게걸스럽게 핥아먹고 싶었어요. … 왜 가지 못했을까요, 병신처럼. 왜 훌훌 떠나 이 지긋지긋한 피를 갈지 못했을까요.
셋째, 이렇게 고통스럽고 떼어내고 싶은 과거지만, 나무가 되어 가는 과정에서 가장 그리워하는 것은 어머니가 집에 두고 간 자주색 스웨터이고 이 스웨터에는 반찬 냄새와 어머니의 살 냄새가 배어 있다. 어머니의 살 냄새는 나무가 된 후 햇빛의 따뜻함과 동일하게 느껴진다. 겨울이 되어, 화분이 좁아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어머니의 스웨터를 갈망한다.
위 내용을 통해 아내의 내러티브를 정리한다면 아내는 고통스러운 기억의 과거를 보냈고, 고통의 공간인 고향을 잊고 싶어하지만 못하고 있다. 또한 어머니/아버지 대상에게 분노하지만 어머니 정동(affects)을 상징하는 스웨터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정보는 소설에서 밝히지 않았다. 왜 부모가있는 고향을 떠나고 싶었는지, 고향에서 왜 고통스러웠는지, 어머니의 정동을 그리워하면서 분노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으며, 아버지는 거의 언급이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저자는 정보가 부족한 소설 속 인물들에 대하여 당시 작가가 적었던 단편 소설을 통해 짐작하려고 한다. 위 서문에서 잠시 밝혔듯 작가가 백일몽을 자료로 소설을 쓴다면, 당시 단편 소설들은 하나의 의미로 거미줄처럼 서로 엮여 있을 것이고, 공유하는 무의식의 흐름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을 평론하거나 분석하는 저자의 경험 역시 이를 경험적으로 지지하는데, 자신의 삶과 작품에 몰입하는 작가의 작품들은 (무의식적 의미에서) 서로 깊게 연결되어 있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따라서 저자는 「내 여자의 열매」 전후 시기의 단편 소설을 토대로 「내 여자의 열매」인물들의 무의식 역동 및 대상 관계를 대략적으로 추론하려고 한다. 이를 위해 당시 단편 소설을 시기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초판 발표 일시를 기준으로 하였다).
1994년: 붉은 닻, 여수의 사랑, 야간 열차, 질주, 진달래 능선1995년: 어둠의 사육제
1996년: 철길 흐르는 강, 흰꽃
1997년: 내 여자의 열매
1998년: 어느 날 그는
초기 단편 소설을 모아 만든 작품집 『여수의 사랑』은 약 1년의 기간 동안 휘몰아치듯 적은 것이며, 두 번째 소설집 「내 여자의 열매」는 이후 5년 동안 비교적 긴 기간에 걸쳐 쓰여졌다(Han 2018b). 이러한 사실을 통해 첫 소설집을 낼 동안 작가의 심리가 매우 역동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 그 시기 작품들은 언어가 닿지 못한 충동적인 심리 에너지를 표상하는 인물, 공간의 묘사와 이에 상응하는 내러티브가주를 이룬다. 전반적인 한강의 소설의 분위기가 암울하고인물들은 하나같이 상처나 결핍, 고통을 안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파국적인 절망은 절대 그 절망에 머무는 것이 아닌 듯하다. 오히려 그의 이 시기 단편 소설들의 죽음과 절망은 그 어둠의 끝을 강박적으로 확인하고 바라보려는 다양한 시도인 듯하다. 이러한 소설 속의 느낌은 정신분석 임상에서 피분석자가 자신의 무의식의 고통을 대면했을 때 느끼는 고통과 유사한 듯하다. 저자는 이러한 관점에서 그의 소설 속에 흐르는 무의식의 흐름을 분석하여 간단하게 정리하였다.
첫째, 초기 한강의 단편 소설에서 어둡고 희망이 전혀 없는 내러티브의 군이 있다. 이를 대표하는 작품은 그의 첫 소설인 「붉은 닻」이다. 아들 둘과 부모가 등장하는 이 소설은 애정이 있지만 남편에게 무력한 어머니, 희망이 없는 이 사회에서 배제된 무력한 아버지, 아버지의 병을 이어받은 아들들을 검붉은 노을과 같은 암울한 텍스트로 풀어내면서 절망 속에 끝을 맺는다. 이러한 희망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운 내러티브를 보이는 다른 소설은 「진달래 능선」, 「어둠의 사육제」이다.
둘째, 유사하게 어둡고 절망적인 무의식의 힘을 그리지만, 주인공이 그 고통의 순간이나 공간을 대면하도록 시도한 작품의 군이 있다. 대표적인 작품은 「야간 열차」이다. 통제가 어려운 무의식의 힘은 ‘야간 열차’로 상징되는데, 소설 첫 구절인 ‘모든 창에 불이 꺼질 때 야간 열차는 떠난다’라는 문장으로 표현되었다. 주인공인 영현과 그의 친구 동걸은 겉보기엔 다른 성격이지만 일상을 파괴하는 무의식의 충동을 공유하고 있다. 동걸은 자신의 쌍둥이가 고등학교 때 자신으로 인해 식물인간이 되었다. 그는 죄책감으로 고된 일상을 표피적으로 유지하다 고통의 근원인 쌍둥이 형제가 죽자 피폐해진 몸과 마음으로 그토록 바랐지만 타지 못했던 야간 열차에 탄다. 영현은 억압된 상처에도 사회에 잘 적응하였으나 동걸을 통해 자신의 깊은 무의식적 상처와 충동을 발견한다. 적응된 일상을 깨야 탈 수 있는 야간 열차를 그는 거부하다가 결국 힘겹게 타게 된다. 이 소설의 끝은 영현이 야간 열차-무의식-에 겨우 올라갔을 때이다. 이 부분을 인용하겠다(Han 2018a).
<인용문 5>
… 난간에 매달렸다. 오른발을 올려놓았다. 빗발이 얼굴에 몰아쳤다. 남은 왼발을 난간에 올려놓았다. 기차 바퀴 소리가 고막을 찢는다. 나는 객실 문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헐떡이는 숨을 골랐다. 엎어지며 다친 무릎과 더러운 손바닥이 화끈거리고 있었다. 나는 마치 오랜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눈을 비비며 빗발 속에서 춤추는 인가의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무의식은 언제나 의식에서 저항을 부른다. 위 텍스트의 느낌은 마치 피분석자가 무의식의 저항에 대면했을 때 그 고통과 느낌의 소설적 표현으로 이해된다. 흥미로운 점은 한강의 소설은 마치 피분석자가 자신의 무의식에 대하여 대면(confrontation)할 때까지의 과정을 플롯의 완결로 여기는 듯하며, 이러한 분석 과정의 단계를 플롯으로 사용함은 작가의 다른 소설에서도 유사하게 적용된다. 이렇게 회피하지 않고 심리적인 고통을 대면하는 과정까지를 플롯으로 한 단편 소설의 또 다른 예는 「여수의 사랑」, 「질주」, 「철길 흐르는 강」이다.
위 두 가지 경우를 보았을 때 내러티브가 절대적으로 절망적이든, 또는 절망의 지점에서 대면을 했든 결국 작가의 의도는 그 고통의 원인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분석가가 분석 과정에서 피분석자가 이해하기 바라는 ‘고통의 원인을 알기 위한 고통’을 소설로서 끊임없이 시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내 여자의 열매」를 보았을 때, 이 소설의 파국적인 결말인 ‘나무가 된 아내’는 결국 이러한 되돌릴 수 없는 비극을 확인하고 대면하고자 하는 소설적 시도로 짐작될 수 있다.
이 시기 한강 단편 소설에서 등장하는 현실적인 어머니의전반적인 특징을 정리하면 ‘남편의 폭력에 무력하게 당하거나 폭력에 적응하여 의지하는’, ‘자녀에게 무관심하거나 보호하지 못하는’, 또는 ‘폭력의 과정에서도 자녀에게 애정을 주려고 하는’ 어머니, 또는 그 조합이다. 예를 들면 ‘남편의 폭력에 무기력하게 당하고 자녀에게 애정을 주지 않는 어머니’는 「여수의 사랑」의 어머니상이며, ‘남편의 폭력에 죽임을 당하나 자녀에게 애정을 주는’ 어머니는 「철길 흐르는 강」에서 등장한다. ‘남편의 폭력에 적응하고 의존하여 자녀에게 애정을 주지 않는’ 어머니는 「질주」에서 나온다. 「붉은 닻」의 어머니는 자녀를 감싸고 사랑하지만 남편의 폭력에 적응하고 의지한다. 이러한 다양한 어머니상들이 있지만 결국 소설의 주인공인 자녀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심한 결핍이나 갈등, 또는 상처를 지닌다.
이러한 현실적인 어머니의 무의식적 층에는 언제나 주인공을 감싸주고 이해하는, 그리고 구원하는 이상화된 어머니 대상이 공존한다. 그의 이 시기 단편 소설의 어머니들은 위 현실 속의 어머니와 함께 생명의 근원으로서 이상화된 어머니가 다양하게 겹쳐 실험되고 있다. 저자의 의견으로는 이러한 많은 무의식적인 실험을 하다가 어머니 대상과의 갈등을 대면하고 해결을 시도한 장편 소설은 『검은 사슴』이다.
그의 당시 소설에서 나타난 여러 어머니 대상의 그림을 통해 「내 여자의 열매」의 여주인공이 관계하는 상처와 분노의 어머니, 그러면서 애정과 생명의 대상으로서의 어머니에 대하여 짐작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강 소설에 전반적으로 흐르는 아버지에 대한 특징적인 인상은 ‘폭력적’이라는 것이다. 「여수의 사랑」의 폭력적인 아버지는 자녀를 억지로 끌고 바닷가에서 자살을 시도하며, 「철길 흐르는 강」의 아버지는 잔인한 폭력으로 아내가 스스로 자살을 하게 한다. 이런 폭력적인 코드는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되어 정치 사회 권력의 다양한 층으로 이어져 한강의 소설을 관통하는 큰 축을 담당한다.
이외 이 시기 단편 소설에서 특징적인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는 ‘거세된’ 아버지다. 사회에서 배제되거나 기능을 못하는 아버지가 특징적으로 나타난 소설은 「붉은 닻」이다. 이 소설에서 아버지는 노래를 좋아하는 주정뱅이, 수시로 집을 나가는 무능하고 무력한 모습이다. 결국 취중에 신발 하나를 남기고 계곡물에 쓸려 시신도 없이 죽는다. 주인공 동걸은 어릴 때부터 ‘발 없는’ 아버지 환상에 반복적으로 시달린다. 이런 거세된 아버지상은 가족과 세상을 포기한 무능하고 무기력한 아버지의 재현이다. 이 소설에서 두 아들은 아버지를 두려워하지만 아버지의 정신과적 병리를 각각 동일시한다. 큰아들 동식은 통제하지 못하는 음주로 간경화에 걸려 죽음을 앞두고 있으며, 작은아들 동영은 해리성 둔주(dissociative fugue)가 의심될 정도로 충동적으로 집에서 나가고 들어온다. 이는 정신분석의 임상에서 공격자와의 동일시(identification with aggressor)를 의미한다.
위에서 설명한 아버지의 (폭력적이고 거세된) 두 가지 모습은 소설마다 다양하게 조립되어 내러티브를 이끈다. 물론 이런 부정적인 아버지상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시기 한강의 소설 중 유일하게 이상화된 아버지상이 「흰 꽃」에 잠시 나타난다. 여주인공은 상하의 흰 옷과 흰 모자를 쓴 익명의 중년 남성을 보고 어릴 때로 퇴행하여 호감을 느끼고 이상화한다. 그리고 이 인상은 이후 소설들(예, 『희랍어 시간』)에서 심한 오이디푸스 갈등을 겪은 후 소설에 남게 된다.
이시기 그의 소설의 아버지상은 잠시 살펴보았듯 리비도적인 흔적이 있으나 부정적인 인상이 지배적이다. 따라서 「내 여자의 열매」에서 잠시 지나가듯 나오는 아버지는 위에서 설명한 아버지 대상의 부정적인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지 않았을까 짐작하게 된다.
무의식의 관점에서 여자에게 남편은 어릴 적 아버지 대상의 연장선이다(Freud 1905). 따라서 「내 여자의 열매」에 나오는 남편은 대부분 위 아버지 대상의 부정적인 인상의 흐름에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의 남편은 사회에서 거세된 무능한 아버지의 속성이 아닌 풍족하지 않지만 직장을 유지하는 평범한 서민의 모습을 하고 있다. 폭력의 속성 역시 직접적이지 않고 ‘관심과 공감의 부족’ 같은 심리적인 부분으로 제한된다. 이러한 변화는 아마도 『채식주의자』에서 가부장적 폭력을 그리기 위한 인물의 설정일 것이다. 작가는 위 소설에서 그 폭력성을 다양한 인물과 사회 구조로 나누어 배치하고 있다. 「내 여자의 열매」가 그 당시 단편 소설들에서 이어받은 ‘남편’에 대한 속성은 심리적인 고통-외로움-이다. 이러한 남편의 인상은 「어느 날 그는」에서의 남자 주인공과 유사하다. 결핍과 상처로 단순한 일상을 겨우 유지하는 남자 주인공 ‘그’는 그의 상처에만 끌려 애인이 되었다는 민화와 잠시 뜨거운 사랑을 나누나 결국 비극적인 결과를 낳게 된다.
「내 여자의 열매」의 아내처럼 한강 소설의 여주인공은 대부분 내면에 깊은 상처, 결핍, 갈등을 억제, 억압하고 외부에 표현하지 않는다. 아마도 심리적인 평형(psychic equilibrium)을 겨우 유지하고 있고, 외부적인 자극으로 인해 하나씩 무너지는(break down) 과정을 보인다.
이제 「내 여자의 열매」에서 제공된 정보와 위에서 추정했던 당시 단편 소설의 자료를 토대로 분석을 한다. 우선 가장 두드러진 ‘아내의 몸이 나무로 단계적으로 변하는 것’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저자는 우선 이러한 몸의 변화를 하나의 ‘심리적인 증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예를 들면 입원 병실에서 “나는 나무예요”라고 하며 서 있는 심각한 정신증의 환자나 “나무가 되고 싶어요”라고 하는 다소 경증의 환자들을 상상하며 이 증상에 대하여 무의식의 역동으로 설명하려 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아내에게 나무는 그의 대상 관계를 기반으로 리비도적인 소망, 공격성, 방어, 초자아적 요소, 현실 등의 요인들이 타협 형성된 증상’이라고 가정한다. 이에 따라 편의상 여러 층들의 무의식 요인들을 나누어 설명하겠다.
그의 소설에서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나무’의 의미는 내재화된 분노로 인한 저항의 상징적 표현이다. 이는 그의 소설 『소년이 온다』에서 정부 군대의 잔혹한 공격에 5.18 시민군의 최후의 저항을 나무로 비유한 예로 설명될 것이다. 이러한 저항의 의미는 임상에서도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관찰된다. 저자는 폐쇄 병동 입원을 거부하는 조울병 환자가 병실에 서서 “나는 나무가 될 것이다”라고 소리쳤던 일, 조현병 환자가 치료를 거부하여 몸이 마치 ‘나무’처럼 굳어지는 경우 등을 경험한 바 있다. 소설에서 아내는 남편이 주는 심리적 좌절에 분노를 하지만 그것을 표현하지 못한다. 이렇게 표현되지 못한 억압된 공격성은 내재화되어 마조히즘의 증상으로 나타난다(Auchincloss 2012). 저자의 또 다른 임상의 예는 공황 발작이 심한 20대 남자 환자이다. 강압적인 아버지에 대한 초자아 공포를 군대나 폐쇄 병동의 공간에서 경험하면서 점점 활동이 줄고 몸이 굳어지고 느려지는 증상을 보였고, 꿈에서 나무로서 ‘나’의 모습을 보고하였다. 환자는 아침에 자신도 모르게-기억도 못한다- 주먹으로 벽을 쳤고, 상처가 심해져도 치료 중에도 마치 자해를 하듯 상처를 계속 악화시켰다. 이 환자는 과거력상 자신의 공격성을 의식에서 인지한 경험이 거의 없었다. 이 사례를 통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좌절되어 내재된 공격성은 나무로 향하는 단계적 변화에 의미 있는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 아내의 꿈에서 나무의 외형에서 보이는 공격성은 과격하다. 여러 의미가 내포된 <인용문 3>에서 보이는 꿈속의 나무는 남편의 공간인 아파트를 파괴하고 탈출한다. 마치 쌓여진 분노가분출하는 듯한 이 나무의 이미지는 아내가 남편에게 받았던 축적된 공격성을 의미하는 듯하다. 이와 같이 공격성이 외부로 향하는 나무의 동적인 의미 이외에 또 다른 무의식적 의미도 있다. 이는 이 통제될 수 없는 내면의 공격성에 대한 방어(defense) 역할을 동시에 한다는 것이다. 위에서 사례로 든 저자의 20대 남자처럼 나무처럼 굳고 느린 몸은 자신의 분출되는 공격성을 막아주는 역할도 하는 것이다. 실제 상담 시간 환자는 부정했지만 저자에게 주먹을 쥐고 위협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나무에 대한 또 다른 무의식적인 요인은 <인용문 3>의 꿈에서 표현된 나무의 속성인 ‘생명력’이다. 사실 한강 소설의 여주인공 대부분의 외모에서 리비도적인 요소들의 흔적을 찾기 쉽지 않다. 대부분 상처와 고통, 삶에 찌들려 있는 주인공에게 행복한 사랑은 불가능해 보였고, 외모 역시 생기가 없는 얼굴에 마르고 건조한 피부를 가졌다. 이런 외형에서 억압된 리비도는 그 근원인 성본능, 즉 생명의 힘으로 꿈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 듯하다. 즉 정신분석적인 이론에서 볼 때, 구성 본능을 거치지 않는 성본능을 표상하는 생명력(Freud 1905)을 나무를 통해 표현한 것이다. <인용문 3>의 꿈에서 뻗은 나무에서 피어나는 ‘흰 애벌레’는 생명이 만든 하나의 생산물이다.
이꿈에서 반드시 지적해야 하는 부분은 뻗은 나무가 보이는 ‘온 가지를 힘껏 벌리고 가슴으로 하늘을 밀어 올리는’ 역동적인 그림이다. 나무의 팰릭한 형태-이 부분은 아직 근거가 부족하다-를 암시하는 모습과 결합된 가슴/모성으로 하늘을 밀어 올리는 인상은 리비도적인 요소가 나르시시즘을 형성하여 담론 공간에서 그 존재를 드러내는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나무가 보이는 분출하고 뻗쳐 나가는 소망만큼 소설 속의 현재는 비참하다. 나무는 남편이 주는 물이 있어야 생존 가능하다는 면에서 소설의 저류에 흐르는 아내의 ‘의존’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장면은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보이는 전통적 여성상의 극단적인 비유를 뜻하는 듯하다. 이는 화분 속의 나무가 남편의 오랜 소망이었다는 점에서 결국 아내는 남편/부모의 공간에서 나가지 못하는 점을 의미한다. 또한 남편이 여성의 존재를 규정하는 생식력의 산물인 ‘열매’를 맛보는 모습이나 감상의 목적으로 다음 해에 꽃을 기대하는 듯한 남편의 말은 가부장 사회에서 종속된 여성의 위치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이를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내재된 초자아에 의한 지배를 의미하며, 초자아의 힘에 굴복하여 지낼 수밖에 없는 자아의 운명을 보여주는 듯하다. 즉 아내는 나무가 됨으로써 자신의 소망을 이루었지만, 결국 이는 남편/내재된 초자아의 소망을 동시에 만족시킨 결과물인 것이다. 이러한 자아와 초자아에 대한 관계는 한강 작가 무의식에서의 흐름에서 해결되지 않는 큰 과제를 던진다. 어떻게 보면 이전이나이후 소설이 이 초자아 대상과 공간을 대면하고 통과하는 기나긴 과정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위 무의식적인 분석과 이해를 간단히 정리하면 아내가 나무가 된 것은 그의 불안정한 무의식적 역동이 남편과 반응하여 만들어 낸 증상이며, 저자의 가설대로 아내의 공격성, 리비도의 만족, 방어, 초자아, 외부 현실의 자극이 타협 형성된 결과물이다(Brenner 1982).
그럼 위 내용을 기반으로 추가적인 질문을 함으로써 부족했던 「내 여자의 열매」의 무의식적인 의미를 보충하려 한다. 저자는 ‘나무가 된 아내’를 망상과 같은 심리적인 증상으로 여기며 논의를 진행하였는데, 사실 소설의 두 화자-남편과 아내-는 이를 증상이 아닌 ‘사실’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아내는 퇴행된 상태에서 자신을 나무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이해하더라도, 남편이 아내의 심각한 증상을 현실로 느끼고 일상을 살아가는 설정은 다소 의아하다. 저자는 이에 몇 가지 설명을 함으로써 이 소설에 대한 무의식적인 의미를 추가한다.
이소설의 주인공은 모두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아내’, ‘남편’이라는 익명성이 주는 효과는 이 인물들이 단순히 특정인이 아니라 사회의 아내, 남편을 의미한다. 따라서 소설에서 망상이나 환상을 사실로 묘사한 작가의 (무의식적인) 의도는 ‘나무가 된 아내’가 바로 작가나 이 사회 아내의 무의식적인 현실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또한 남편이 이 비현실적인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도 의미가 있다. 아내의 정신증을 현실로 묘사한 남편의 내러티브의 효과는 남편 역시 망상적인 사고로 퇴행시키는 효과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는 남편의 소망대로 아내를 화분에서 기를 수 있게 되었지만 자신 역시 (나도 모르게) 정신증의 세계에 머무는 공멸을 뜻할 수 있다. 즉 가부장적인 공간에서 아내뿐만 아니라남편 역시 파국적인 결과를 보인다는 의미이다. 이는 아마도 작가의 뿌리 깊은 분노가 이러한 설정으로 표현되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저자는 소설가 한강의 내면적 고통이 압축되어 표현된 단편 소설 「내 여자의 열매」를 임상에서 경험하는 무의식적 관점에서 분석을 시도하고 설명하였다. 지금도 진행 중인 작가의 소설 흐름에서 「내 여자의 열매」는 무의식적인 결핍과 상처, 갈등이 극단에 이른 시기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를 단순한 어둠의 분출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통합하고 언어로 대면하기 위한 고통스러운 과정으로 설명하였다.
저자는 우선 ‘나무가 된 아내’를 임상에서 관찰되는 증상으로 이해하고 그 이유를 분석하였다. 저자가 여기서 밝힌 ‘나무가 된 아내’는 그의 무의식적인 갈등과 결핍, 상처 등이 응축된 결과물이며, 그 외부 자극 요인은 남편에 의한 네 번의 좌절이었다. 즉 이러한 증상은 외부 현실의 자극과 아내의 리비도적인 만족, 공격성, 방어, 초자아 등이 타협 형성된 산물임을 밝혔다.
이소설과 임상의 차이점은 아내와 남편이 ‘나무로 되는증상’을 사실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저자는 그 이유에 대하여 이 사회에서 익명의 ‘아내’의 현실이 남편에게 길러지는 나무라는 것을 시사한다고 설명하였다. 또한 ‘남편’도 그가비록 이 가부장적인 공간에서 아내를 지배하나 그 역시정신증적인 퇴행의 상태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분석의 한계점은 저자가 시도하고 있는 분석의 근본적인 질문일 것이다. 과연 소설가가 어떻게 분석의 상황처럼 자신의 소설을 통해 주인공의 무의식적인 상처와 결핍, 갈등을 해결할까? 저자는 이런 질문에 대하여 저자가 평론을 쓰거나 분석했던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예술 활동을 통해 나를 통합하고 표현한다는 점을 말할 수 있다. 또 다른 예는 소설에서 작가의 분신인 인물을 통해 주인공의 무의식적인 성장을 이끌었다고 주장했던 프로이트의 논문인 «빌헬름 옌젠의 ‘그라디바’에 나타난 망상과 꿈»이다(Freud 1907). 여기서 억압된 과거에 의해 망상과 환영에 시달리는 남자 주인공 노르베르트의 증상은 그를 어릴 때부터 사랑했던 조에의 정신분석적인 치료적 접근으로 나아지게 된다.
대부분의 진지한 작가들이 그렇듯 한강은 자신만의 언어를 통해 담론의 공간에서 나를 발견하고 나의 존재를 말한다. 이는 2000년 그가 『내 여자의 열매』 소설집을 낼 시기 <작가의 말> 말미에 적었던 문장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나는 때로 다쳤다. 집착했고 욕망했고 스스로를 미워하기 시작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부끄러움을 배웠고, 점점 낮아졌고 작아졌고, 그래서 그 가난한 마음으로 삶을 조금씩 더 이해하게 되었던 것 같다. 깊숙이 들여다보려 애썼던 것 같다.
그러는 동안 글쓰기는 나에게 존재하는 방식이었다. 숨 쉴 통로였다. …(Han 2018b)
작가는 고통스런 마음의 응축된 에너지를 「내 여자의 열매」를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하였고, 이후의 소설을 통해 그것을 분해하고 통합하는 또 다른 고통스런 과정을 글로 표현하였다. 무의식을 느끼고 이를 문학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소설가의 고유한 몫인 것 같다(Freud 1907). 한강 작가는 자신이 느끼는 무의식적 경험을 마치 분석의 과정처럼 표현하였다. 이러한 소설들을 이해하는 데 있어 저자는 임상에서 축적된 정신분석의 경험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저자가 회화 등 예술의 영역에 대한 분석을 하면서 주장했던 내용과 유사하다(Lee와 Yoon 2019).
이렇게 예술이나 문학 등을 이해함에 있어 임상에서 경험한 무의식의 미학이 의미 있는 위치에 있음을 저자는 지속적으로 분석하고 주장할 것이다.
None
The authors have no potential conflicts of interest to disclose.
Conceptualization: Hyun Kwon Lee, Hye Ri Yoon. Investigation: Hyun Kwon Lee. Methodology: Hyun Kwon Lee. Project adminis-tration: Hyun Kwon Lee. Writing—original draft: Hyun Kwon Lee. Writing—review & editing: Hyun Kwon Lee, Hye Ri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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