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에 정신분석학계에 두개의 문헌이 발표된다. Paul Gray의 ‘Developmental lag in the evolution of technique for psychoanalysis of neurotic conflict’와, Donald P. Spence의 ‘Narrative truth and historical truth, meaning and interpretation in psychoanalysis’이다. 두 정신분석가는 모두 미국의 자아심리학분석가로(적어도 자아심리학에서 출발한) 당시의 정신분석학에 내재한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그 해법을 제안하였다. Gray (초판 1994, 재판 2005)는 이후 자신의 문헌들을 모아
공교롭게도 같은 해에 발표한 두 분석가의 연구는 그 시기의 정신분석이 어떻게 양분되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Gray는 정신분석이 자아의 발전과 성숙을 목표로 하며, 이를 위해 분석 과정은 방어와 저항의 분석(analysis of defense, resistance analysis)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많은 정신분석가들이 환자의 방어와 저항의 분석을 회피하는 경향을 꼬집으며, 이 방법론이 당장은 분석가들에게 힘들고 만족을 덜 주지만 환자에게 진정한 성숙과 독립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결국 가장 큰 만족을 주는 정신분석의 방법론이라고 강조한다. Spence는 이와는 매우 다른 방향으로 정신분석에 혁명적인 방법론을 제시한다(Wallerstein 1982). 그에 의하면 인간의 정신을 탐구하는 정신분석은 결코 역사적(과학적) 진실을 추구할 수 없다. 그는 정신분석에서 다루는 모든 것들—과거의 기억, 무의식, 저항, 전이 등—은 단지 ‘서사적 진실(narrative truth)’의 일부이며 객관적인 타당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정신분석의 해석은 과학적 사유로서 타당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에게 새로운 관점을 열어주는 ‘서사’를 창조하는 것이며, 정신분석의 목적은 환자가 자신의 삶을 새로운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서사를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두 사람의 관점은 마치 서로를 겨냥한 듯이 상대방의 논리를 해부하고 폐부를 찌른다. 또 다른 한편, 서로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동떨어진 자신들의 논리를 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이 두 글을 우연한 기회에 연달아 읽게 되었는데, 우선 이 두 문헌이 같은 해에 발표되었다는 것이 매우 흥미로웠다. 그 해 미국정신분석학계의 두 거장이 무심한 듯 서로의 심장을 겨냥하는 두 글이 그 시대 정신분석가들에게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켰을까? 그때의 정신분석가들은 이 양대 산맥이 이후 이상한 동거를 지속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을까? 뚜렷이 구분되지도 그렇다고 절충하고 통합되지도 않은 채, 필요에 의해 어떤 때는 서로에 반대하고 어떤 경우에는 서로 같은 말을 하는 건지 헷갈리면서 말이다.
Gray와 Spence는 프로이트 이후 진화해 온 정신분석적 진실(psychoanalytic truth)에 관한 관점을 각자의 입장에서 집대성하였다. Gray는 프로이트 이후 Anna Freud와 Heinz Hartmann을 필두로 한, 자아의 성장이 정신분석의 목표라는 관점에 따라 발전한 미국의 자아심리학, 그리고 Spence는 당시 학계를 강타한 현대 해석학 ‘Modern Hermeneutics’a과 인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은 관계중심의 정신분석을 대표한다. 두 입장은 궁극적으로 정신분석의 방법론에 대한 것인데, 나는 그 방법론의 핵심이 한쪽은 ‘저항 분석’, 다른 한편은 ‘서사적 진실의 창조’로 축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두 입장이 이렇게 다른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나는 이 양분화가 20세기 초중반, 자연과학주의에 대한 비판과 회의에 의해 자극되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학문과 문화가 그렇듯이 정신분석의 본질도 양면성 혹은 복잡성이 내재한다. 이것이 균형과 조화 속에서 통합되기보다 양분화의 길을 가게 된것은, 자연과학으로서 정신분석의 지위를 위협하는 정신분석 안팎의 비판에 대처하는 방식에서 서로 타협할 수 없는 입장차이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Lee 2022). 그런데 이 암묵적인 불편한 동거에 대해 명시적으로 문제화하고 그 해법을 제안한 문헌은 찾기 어렵다. 이 논문을 통해 나는 정신분석의 방법론이 저항분석과 서사적 진실의 창조로 양분된 이유를 살펴보고, 정신분석가들이 방법론의 명확한 구분과 식별없이 임의로 채택하여 치료과정에 적용하는 방식이 왜 문제인지 고찰하고, 그 문제의 해법이 될만한 한가지를 제안하려고 한다. 그것은 이 두 상반된 관점을 상호보완의 방식으로 통합하는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증례를 통해 면밀히 조사하고 구체적인 기술적 논의를 할 것이다.
서론에서 요약한 바와 같이 1900년대 후반의 정신분석학계는 상호배타적으로 보이는 두 관점을 양대 산맥으로 하여 극심한 의견의 차이를 보였다. 정신분석의 방법론에 관한 이 상호배타적 관점은 프로이트의 문헌에서부터 이미 존재했고, 모든 정신분석가들이 수용하고 극복해야 하는 숙명이 되었다. 프로이트 역시 일생에 걸쳐 두 관점을 왔다 갔다 했다. 프로이트는 일찌기 정신분석을 환자의 숨겨진 혹은 잊혀진 과거를 기억하게 하는 것, 즉 무의식의 것을 의식화하는 것(Freud 1893-1895, 1914, 1915)으로 보고, 잊혀진 무의식을 재건(reconstruction) 하는 것을 강조했지만, 곧 환자의 기억 즉 역사적 진실로 보였던 것들이 사실(fact)이라기 보다 심리적 현실이었음을 깨닫는다. 이후 그는 점차 자아와 의식에 대한 작업을 중요하게 생각하고(Freud 1914, 1917, 1923), 저항 분석이 정신분석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Freud 1917, 1937a). 그러나 프로이트는 그 사이에 또 그 이후에도 두 관점 사이를 무수히 왔다 갔다 하는데(Gray 1982), 자아에 대한 작업, 저항분석에서 다시 환자의 무의식에 대한 직접적인 작업으로 되돌아가곤 했다. 그의 후기 문헌(Freud 1937b)에서는 무의식에 억압된 환자의 판타지, 심리적 현실 자체를 밝히는, 즉 현재의 관점에서 서사적 진실의 추구 방식을 선호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이후의 분석가들은 어느 한쪽 관점에 조금 더 기울어졌겠지만, 프로이트와 같이 두 관점 모두에 어중간하게 발을 담그고 분석작업을 해왔을 것인데, 이는 프로이트로부터 이미 시작된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프로이트 이후 Anna Freud와 Heinz Hartmann을 시작으로 자아와 방어의 분석을 지향하는 자아심리학 그룹과 영국의 대상관계학파를 위시한 관계중심 정신분석을 지향하는 그룹이 관점을 서서히 달리하며 발달하였다. 영국의 대상관계학파는 ‘관계’라는 새 명패를 달았지만, 치료과정에서 해석의 방식은 오히려 고전적인 방식인 프로이트의 ‘무의식의 의식화’, ‘무의식의 재건’을 추종하는 것으로 보였다. 또 이후의 관계학파(relational school)에서도 공감과 상호작용의 개념으로 새단장 했지만, 실제 방법론에서는 환자가 치료자의 태도를 함입함으로써 치료적 변화가 가능하며 자아와 의식을 거치지 않은 무의식 수준의 상호작용을 방법론으로 채택하는 등, 무의식에 초점을 맞추는 정신분석적 방법론에 상당히 기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1900년 중반 세계문화 전반을 강타한 자연과학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회의감이 정신분석학에도 밀려들어오게 되었다. 정신분석학계 안팎으로 정신분석은 유사과학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비난이 거세었고, 이에 대해 정신분석가들은 나름의 방어전을 펼쳤다. 이때 그들의 방어가 크게 두 방향으로 나누어졌는데, 한 쪽은 자연과학으로서의 정신분석을 지키기 위한 노력으로 ‘관찰가능한 지금-여기’의 자료에 초점을 맞추어, 의식과 자아에 대한 작업, 즉 방어 분석을 더욱 면밀하고 세심하게 수행하는 것에서 그 해법을 찾았다. 반면 해석학적 정신분석가들은 아예 정신분석은 애초에 자연과학일 수가 없었으며, 역사적 진실을 폐기하고 서사적 진실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다(Gedo 1997; Lee 2022; Spence 1982). 이후 양측의 분석가들은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은 관점을 가지고 서로 명시적으로 수용하지 않으면서도, 함께 환자에 대해 논의하고 정신분석적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한쪽은 자연과학으로서 정신분석을 지키려고 하고, 다른 쪽은 자연과학에 미련을 버리라고 하면서 함께, 같은 환자에 대해 논의해오고 있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고 신기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분석가 사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분석가 한사람 한사람의 관점 역시 상호배타적인 이 두 관점의 이상한 동거가 지속되고 있다.
현재의 정신분석가들은 이 두 관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Gray (1996)가 방어분석을 주로 사용하여 치료효과를 얻을 수 없는 특별한 부류의 환자들이 있다고 언급한 것처럼, 각각의 접근법에 따른 환자군이 다른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발달학적으로 보다 미숙하고 심한 병리를 가진 경계선 환자와 정신증적 환자를 저항분석을 통해 치료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매우 경험이 많은 분석가가 치료과정 내내 세밀한 작업을 해야만 한다. 이런 방식은 치료자 뿐 아니라 환자에게도 매우 고된 작업이고, 당장의 보상과 만족감이 없는 오랜 시간을 견딜 것을 요구한다. 이런 이유로 깊은 병리를 가진 환자의 정신분석에서 그 방법론이 서사적 진실의 추구로 이동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해석학적 분석가들은 환자의 연상에서 치료자가 서사적으로 어울리는 해석(interpretation with narrative fit)을 구상하여 제시했을 때, 환자는 쉽게 설득되고 그러면 두 사람 사이에 서사적 진실이 창조된다고 여긴다(Spence 1982). 미적 경험을 주는 서사적 진실의 창조는 환자와 치료자 모두가 즉각적으로 만족하고 비교적 손쉬운 성취감을 얻을 수 있게 한다. 이는 경계선 및 정신증적 환자군에서 서사적 진실의 창조라는 방법론으로 기우는 분석가들이 많아지는 이유 중 하나일 수 있다.
그렇다면 깊은 병리의 환자군에게는 해석학의 영향을 받은 관계중심의 정신분석 접근을 하고, 보다 성숙한 신경증적 환자에게는 자아심리학의 방어 및 저항 분석 접근을 하면 되는 것일까? 여기서 또 하나 생각할 문제는, 최근 정신분석의 대상이 점차 경계선 병리나 정신증적 병리를 가진 환자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향후 정신분석의 방법론에서 자아에 초점을 맞추는 방어와 저항 분석은 퇴출되고 서사적 진실의 창조를 추구하는 해석학적 정신분석이 득세하여 최종적으로 살아남게 되는 걸까? 그것이 아니라면 각자가 자신의 취향에 따라 또는 환자의 취향에 따라 정신분석적 방법론을 선택하면 되는 것일까? 취향에 따라 도구를 선택했을 때, 서로 다른 결과에 대한 치료자의 책임은 없는 것일까? 많은 질문과 우려가 존재한다. 이에 대한 논의를 이어가기 위해 현재 양분화 현상과 그 문제점을 살펴보겠다.
현재의 정신분석은 다양성의 시대라고 한다. 그러나 정신분석의 다양한 개념들이 걸치고 있는 겉옷을 벗겨내고 방법론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궁극적으로는 양분화된 상태에 가깝게 보인다. 나는 현대 정신분석이 여전히 욕동에 관한 또는 욕동을 중심에 두는 정신분석, 즉 고전적인 방법론의 정신분석과, 자아에 대한, 자아를 중심에 두는 정신분석, 즉 자아심리학적 정신분석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앞서 정신분석 방법론에 대해 프로이트가 지속적인 혼란을 보인 점에 대해 논의했는데, 그 혼란은 현재까지도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Waelder (1967)와 Gray (1982, 1996)를 포함한 여러 분석가들도 비슷한 의견을 제시하였다. 나는 서사적 진실의 창조를 치료 목표이자 도구로 삼는 해석학적 정신분석 방법론이 궁극적으로는 욕동을 분석 과정의 중심에 두며, 상대적으로 자아기능에 대해서는 우회하는 고전적 욕동 정신분석으로 회귀하는 현상이라고 본다. 대상관계이론과 관계학파는 치료관계, 치료상호작용, 공감, 진실의 창조 개념 등 새로운 겉옷을 걸쳤지만 그 면면을 세밀히 살펴보게 되면, 환자의 자아기능, 방어와 저항에 초점을 맞춰 환자의 자아와 협력하는 대신 치료자의 직관에 의지하는(환자 자아가 치료자의 사고과정을 공유하여 함께 협력하는 치료과정이 되기가 어려운) 환자 무의식에 대한 해석, 치료자의 태도와 해석을 함입함으로써 환자가 변화하는, 즉 긍정적 전이를 이용하는 치료과정의 방식 등에서 이들이 고전적인 정신분석 방법론으로 회귀하는 경향(Friedman 1969)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정신분석의 큰 흐름이 욕동과 본능에 대한 고전적 정신분석에서 자아의 정신분석으로, 또 다시 자아를 거치지 않고 욕동에 초점을 맞추는 고전적 정신분석으로 회귀하는 경향은 현재 정신분석학계와 분석가 개개인의 임상현장에서 명시적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많은 정신분석가들이 스스로가 다시 고전적인 욕동 정신분석으로 회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현대 정신분석의 분파를 초월하여 전반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해석학적 정신분석의 방법론인 ‘서사적 진실의 창조’에는 바로 고전적 정신분석 방법론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는 분석가가 드물다. 환자의 심리적 현실에는 욕동 파생물(drive derivatives) 뿐 아니라, 현실에 대한 방어와 저항의 요소가 있다. 서사적 진실의 창조를 방법론으로 채택하는 분석가들은 환자의 방어와 저항의 요소보다는 욕동의 측면에 시선을 고정하는 경향이 있다. 환자의 서사, 심리적 현실에 어울리는 해석은(interpretation with narrative fit, Spence 1982) 환자의 욕동 측면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서사적 진실의 창조 방법론은 프로이트가 선호한 방법인 환자가 억압하고 회피하는 욕동에 대해 직면하는 해석과도 차이가 있어, 억압하고 회피하는 욕동을 깨닫게 하기 보다는 환자의 심리적 현실을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 역효과가 생길 수 있다.
분석가들이 고전적 정신분석 방법론으로 회귀하려는 경향을 Gray (1982)는 정신분석의 ‘발달지연(developmental lag)’ 이라고 명명하고 이런 현상의 원인이 분석가들의 만족추구 경향에 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에 의하면 고전적 방법론은 환자가 모르는 것을 분석가가 제시하는 것으로 암묵적으로 권위자로서의 분석가의 지위를 전제하는 것이다. 이 방법론과 분석가 자신의 권위자로서의 인식이 분석가들에게 자기애적 만족감을 준다. 이에 비하면 자아의 분석은 환자 자아의 협력을 이끌어내어 환자가 스스로 관찰하고 성찰할 수 있도록 돕는 방법론으로, 분석가는 ‘보이지 않는 손’이 되어야 한다. 환자 옆에서 끊임없이 보조하지만 결코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 역할인 만큼, 분석가들에게 즉각적인 만족을 주지는 못한다. 나는 그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동시에 분석가들의 좌절에 대한 방어, 분석가들의 방어적인 측면도 강조하고 싶다. 현대의 정신분석가들은 점차 병리가 더 깊은 환자들을 치료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현대사회의 기술발전이 낳은 초연결성, 그리고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결과주의의 흐름은 사람들을 실제적인 고립과 소외 상태로 내몰고, 그들의 부정적 자기 인식을 부추기는 등, 자아발전과 성숙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Lee 2019). 임상 현장의 치료자들은 실제로 심한 병리의 환자들의 비율이 높아진 것을 체감하고 있다. 그런데다 미디어의 급격한 발전으로 이를 통해 제공되는 여러 자료들이 비교적 자아기능이 괜찮은 사람들에게는 자기-치료를 어느 정도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정신분석을 찾는 환자들의 대다수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떤 방법으로도 나아질 수가 없는 심한 병리의 환자들인 것이다. 심한 병리의 환자를 맞이해야 하는 분석가들은 치료과정에서 견디기 힘든 좌절과 실패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분석가들 자신의 좌절과 패배감에 대한 방어기제로 좀더 부드러운 분석(softer analysis)으로 전향하게 되는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정신분석가 각자가 정신분석학계와 자신의 임상실제에서의 양분화 상태를 인식하고, 고전적 욕동 정신분석으로 회귀하는 경향을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자신이 환자의 자아와 협력하고 있고 환자의 방어와 저항을 분석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부지불식간에 방어적으로 고전적 방법론으로 회귀하기 쉽다. 이렇게 되면 환자의 저항에 치료자가 공모하고, 치료자는 역전이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행동화(enactment)하게 된다. 한편, 정통(orthodox) 자아심리학의 옹호자들은 서사적 진실의 창조 방법론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고 더욱 저항분석에만 치중하는 경우도 있다. 이 또한 방법론으로서의 저항분석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심한 성격병리를 가진 환자와의 치료과정이 지나치게 건조하고 견디기 힘들어져서, 결국 치료 성공에 다다를 때까지 치료가 이어지지 못하고 중도 포기하는 치료자와 환자가 생기게 된다. 환자와 치료자가 답답하고 지루하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치료과정을 견디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서사적 진실의 창조라는 따뜻하면서도 시원한 위로의 물 한모금이 꼭 필요한 때가 있다. 이처럼 저항 분석과 서사적 진실의 창조, 양측 모두 필수적이고 유용한 정신분석적 방법론이다. 각각의 방법론이 어떤 측면에서 필수적이고 유용한지, 어떤 측면에서 치료과정을 저해할 수 있는지를 분명히 인식할 때, 양쪽의 방법론을 상호보완하여 가장 효율적인 치료과정이 일어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각 방법론의 특성과 한계에 대해 살펴보겠다.
저항 분석은 Gray (1996)가 ‘면밀한 관찰 과정(close process attention [저자 번역])’이라고 칭하기도 했는데, 환자의 방어에 지속적이고 면밀하게 초점을 맞추는 방식이다. 그의 의견을 빌리면 저항 분석을 주된 치료적 방법론으로 한 분석이 성공적일 수 있으려면 경험이 많은 노련한 치료자의 지속적인 개입이 요구된다. 치료자는 환자가 욕동에 대해 방어 혹은 저항하는 방식(특히 전이적 욕동에 대한 방어와 저항)을 매우 세밀하게 관찰하고 매우 정교하게 개입해야 한다. 이러한 방식은 치료자와 환자 모두에게 당장의 보상과 만족감을 주기가 힘들다. 치료자가 능숙하지 않을 경우 환자는 치료자의 방식에 답답함과 지루함을 느끼고 치료를 거부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훈련된 치료자와 강한 동기의 환자가 이 방식의 치료과정을 견뎌냈을 때, 궁극적으로 더 큰 보상과 만족을 얻을 수 있다(Gray 1996). 환자의 진정한 독립과 자아의 성장이라는 최종적인 결과는 정신분석의 궁극적 목표이자 치료자와 환자에게 있어 가장 큰 성취감을 안겨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서사적 진실의 추구 방식에는 치료자의 경험과 훈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다. 치료자가 직관적, 즉흥적으로 환자의 심리적 현실에 서사적으로 어울리는 해석을 구상하기 때문에, 치료자의 타고난 직관과 언어적 수사와 기교에 의해 영향을 많이 받는다. 서사적으로 어울리고 미적 경험을 주는 해석은 강한 설득력을 가지게 되어 환자는 이를 쉽게 받아들이고(Spence 1982) 치료자는 이로서 만족감을 얻게 된다. 그러나 서사적 진실의 창조가 어떻게 치료적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현재까지 거의 없었다. 환자에게 치료적 변화가 일어나는 경우도 많이 있겠지만, 그 기전에 대한 논의가 부족하니, 그것이 서사적 진실의 창조에 의한 변화인지 명확하게 말하기 어렵다. 나는 이 변화의 기전이 긍정적 전이를 매개로 하여, 환자가 치료자의 태도와 해석을 함입한 결과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또 한가지 경계해야만 할 것은, 이 방식의 치료과정이 환자의 기존의 왜곡된 심리적 현실을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 결과도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해석학적 정신분석가의 대표라 할 수 있는 Schafer (2005)는 자신의 임상 여정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쓴 논문에서 “…‘내적 갈등의 서사를 무분별하게 사용할 때 일어날 수 있는 이론적, 기법적 부작용에 대해서는 경계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환자의 서사를 개작(retelling)하여 내적 갈등을 이야기하는 것을 여전히 선호한다(인용부호 저자 추가)”라고 밝혔다. 그는 무분별하게 서사적 진실을 추구할 때 일어날 수 있는 이론적, 기법적 부작용에 대해 짧게 언급하면서, 이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이 없어 그가 어떤 것을 경계하는지 명확하지는 않다. 나의 견해로는 서사적 진실 추구가 저항 분석을 회피하게 되는 경향을 낳으며, 분석가가 자신의 역전이—특히 자기애적 필요를 충족시키려는 욕구로 인해 환자의 방어와 저항을 우회하는—를 인식하기 어렵게 하는 부작용이 있다고 생각한다. 분석가가 권위적인 위치에서 서사적으로 어울리는 해석을 제시하게 되고 환자가 이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과정은 분석가에게 상당한 자기애적 만족을 제공한다. 나는 “창조한다”라는 개념 자체에도 상당한 우월감에 도취될 수 있는 요소가 배어 있어 분석가가 쉽게 유혹당하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정신분석의 양분화는 자연과학으로서의 정신분석에 대한 상반된 관점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어떤 지점에서는 결코 공유할 수 없는 관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서로의 한계를 보완하는 방식으로 치료과정에 유익한 절충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한다. 상호보완의 가능성과 그 방식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증례를 살펴보면서 이어가려고 한다. 증례를 보기에 앞서 A의 치료과정 동안 내가 사용한 정신분석 방법론이 어떻게 변했는지 설명해야 하겠다. 나는 정신분석의 자연과학으로서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정신분석가들이 임상에서 객관적 관찰자의 중립성을 유지하고, 환자의 자아 성장과 치료적 변화를 정신분석의 목표로 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A의 분석을 시작할 당시 나는 심한 성격병리를 가진 환자와의 분석적 치료에서 노련하고 기술적인 개입을 할 만큼 경험을 쌓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치료과정에서 견디기 힘든 고통과 지난한 교착을 마주했을 때, 살아남기 위해 서사적 진실의 추구라는 방법론을 도입해 보았다. 그러나 그 또한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과정에서 양 방법론의 특성과 한계가 점차 분명해졌고, 나는 이를 통합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나는 근본적으로 자아심리학의 입장에서 방어와 저항 분석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서사적 진실의 추구 방법론으로 보완하는 방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미리 전제해야 하겠다.
A의 분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A의 잦은 결석과 오랜 침묵, 그리고 현란한 서사로 이루어진 대화이다. A의 분석이 3년째가 되면서 나는 A의 결석과 침묵, 그리고 나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꼼짝달싹 하지 않는 저항에 점차 지쳐갔다. 그러나 나는 A가 새롭고 흥미로운 서사로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새로운 서사를 함께 창조하는 것이 정신분석의 목표라는 해석학적 정신분석의 관점에 기대어 다시 기운을 내곤 했다.
A는 자신의 내적 세계를 매력적으로 표현하는 재주가 있었다. 불안정하고 요구가 많은 어머니에 대한 증오와 죄책감에 대해서는 끝없이 이어지는 미로에 갇혀 있는 자신의 절망감, 자살하려는 엄마를 막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어린 아이였던 자기자신, 그리고 다 자랐지만 엄마가 뛰어내리려 했던 그 발코니를 떠나지 못하는 불안감으로 표현하였다. 또 부모님과 가학-피학적인 방식으로 드러나는 병적인 의존욕구를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가 자욱한 절벽에서 어른들이 한발자국 내밀라고 등을 떠밀고 있는 장면으로 묘사했다. 어른들은(부모님과 분석가) 그 앞이 절벽이 아니라고 그녀를 설득하면서 등을 떠밀지만, 그녀는 어른들이 잔인하게 그녀를 절벽 밑으로 떨어뜨리려는 것 같이 느껴져 끔찍하게 공포스럽고 그럴수록 더욱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녀의 서사는 내가 훨씬 깊이 공감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어머니와 그녀의 끝없이 얽혀 풀리지 않는 미로와 같은 증오와 애착, 그리고 그들의 공생관계, 또 절벽 아래로 밀려 떨어질 듯한 공포, 의심, 배신감, 분노 등 모든 것이 생생하고 손에 잡힐 듯이 눈에 그려졌다.
A가 새로운 서사를 내놓으면 나는 희망을 걸고 그 서사를 확장해서 돌려주었다. 물론 A는 나의 해석을 잘 받아들였고 대단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표현을 하곤 했다. 그러나 A는 또 결석하고 침묵하고 일상생활에서 다시 퇴행했다. 당시에는 A가 왜 이토록 치료에 저항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돌이켜보면 당시 나의 해석은 주로 A의 심리적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그녀의 심리적 현실에 서사적으로 잘 어울리는 것들(interpretation with narrative fit, Spence 1982)이었다. 멋진 비유와 수사적 표현으로 이루어진 A의 연상들은 그 자신과 나에게 큰 미적 만족감을 주었다. Spence (1982)는 미적 경험은 그 자체로 서사적 진실을 창조한다고 주장했는데, 그의 관점에 의하면 미적 만족감 그 자체로 진실에 가까워졌다고 느끼게 했기 때문에, A가 왜곡하고 방어하는 현실의 측면을 조명하는 것을 간과했고, A에게 변화도 일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점차 서사적 진실의 창조라는 정신분석 방법론이 과연 ‘자아의 성장과 치료적 변화’라는 정신분석의 목표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의문이 생겼다.
분석 4년째인 어느 날 A는 연달아 며칠을 결석한 다음에 와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제가 마치 한 마리의 새인 것 같아요. 그런데 땅에 떨어져 날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어요. 제가 선생님에게 오지 못한 동안 그런 느낌이었어요. 올 수가 없었어요. 선생님이 나에게 다가와서 두 손으로 감싸서 나를 들어올려주었으면 좋겠어요. (침묵) 그런데 아세요? 그 새가 날지 못하는 이유는 온 몸에 검은 타르가 끈적끈적하게 묻어 있어서 그래요. 내 몸에 끔찍한 더러운 것이 묻어 있는데, 나는 그것을 벗어날 수가 없어요. 선생님이 과연 그것을 씻어줄 수 있을까요? 선생님이 씻어 주신다고 해도 내가 다시 날 수 있을까요? 너무 늦은 게 아닐까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에게는 복잡한 감정이 일어났다. A의 심리적 현실이 어떤지 이해할 수 있었다. A는 이기적인 세상에서 피해를 입은 한 마리 여린 새이고, 안간힘을 다해도 날 수 없는 상태로 오로지 치료자인 나의 도움만을 갈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도움도 자신을 살리는데 충분하지 못할 것이라 느껴서 절망적인 마음 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심리적 현실에 잘 맞는 서사적 해석을 A에게 돌려준다고 해도 A는 어떤 변화도 없이 계속 분석에 결석하고 늦고 침묵할 것이라는 생각에 나또한 타르 묻은 새처럼 꼼짝할 수가 없는 기분이 들었다. 1-2년 전이라면 나는 역전이 감정을 통해 A의 마음을 더 세심하게 이해하여 “A씨가 얼마나 절망적이고 처참한 마음인지 제 마음에 느껴지네요. 저에게 오지 않은 동안 제가 죽어가는 A씨를 내버려두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셨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새의 몸에 묻은 검고 끈적끈적한 더러운 타르는 A씨가 두려워하는 저의 무관심, 저의 비난인지도 모르겠군요. 저의 무관심과 비난이 두려워 A씨는 꼼짝도 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라고 해석했을 것이다. 그러면 A는 분명 이해 받았다는 기분이 들어 내 해석을 수긍하며 검고 더러운 타르에 대해 다양한 연상을 이어갔을지도 모르겠다.
4년간 A의 분석을 통해, 이런 전개가 A의 태도를 전혀 변화시키지 못할 것이고, 오히려 기존의 심리적 현실을 더욱 공고히 만드는데 이용될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나는 그런 해석을 할 수 없었다. 많은 생각이 스쳐간 후, 무엇이라도 달라지기 위해서는 A가 외면하고 있는 현실적 부분, 즉 방어와 저항에 다시 초점을 맞춰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좌절감에 피하고 있었지만, 결국 저항 분석 외에 돌아갈 길은 없다는 것이 분명했다. 내가 입을 열었다. “A씨의 이야기를 들으니 얼마나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운 마음인지 알 것 같습니다. 더구나 검고 더럽고 끈적끈적한 타르가 몸에 묻어 있다는 비유는 A씨의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정말 잘 이해하게 해주는 표현인 거 같아요. 그런데 A씨는 그 더러운 것이 세상에서 묻혀온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런가요?” A의 눈빛이 잠깐 흔들리고 나서, A는 “저는 그렇다고 생각했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그랬군요.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 새는 세상과 다른 사람들을 증오하고 원망할 수 밖에 없었겠어요”라고 했다. 지금은 저항을 다루기에 적절한 때가 아닌 걸까? A가 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나는 A의 감정에 좀더 다가가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물었다. “A씨에게 그런 더럽고 끈적끈적한 것을 묻힌 세상 사람들에 대한 A씨의 마음을 좀더 들어보고 싶어요.” A는 내가 묻는 의도를 파악한 듯 했다. 이전처럼 술술 이야기하지 못하고 중간중간 자신의 말의 진위를 스스로 가려내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글쎄요. 지금까지 엄마나 아빠가 나를 통제하고 자신들의 기준에 맞추기를 강요했다고 생각했어요. 특히 엄마는 자기 기준에 내가 맞지 않으면 내가 너덜너덜해지도록 비난했어요. 그런데…. 모르겠어요. 정말 엄마, 아빠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된 것인지. 내가 엄마, 아빠 탓을 함으로써 내 문제를 회피하려고 하는 것 같기는 해요.” A는 나의 의도를 파악하고 마지못해 자신을 성찰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녀가 사용한 “회피”라는 단어는 저항을 다루는데 매우 소중한 재료이다! 나는 A의 마음 속에서 어떤 변화가 아주 조금이라도 생겨나기를 침묵 중에 기다렸다. A는 시선을 바닥에 두고 한참 있다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A에게 이렇게 말했다. “A씨가 자신의 문제를 피하려고 하는 것 같다는 말이 저는 많이 공감되요. 이렇게 며칠씩 치료에 빠지는 것은 뭔가를 피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거든요. (잠시 침묵) 끈적끈적하고 더러운 타르가 A씨가 피하고 싶어하는 그 무엇인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요?” A의 표정은 어두웠지만 내 해석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사실 저도 제가 다른 사람 탓을 하면서 내 문제를 피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환자의 서사에서 나타나는 저항에 초점을 맞출 때, 해석은 환자 마음에 이질적이고 거북한 것일 수 밖에 없으므로 모든 맥락을 고려하여 점차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이에 관하여는 뒷부분에서 다시 자세히 논의하겠지만, 여기서는 내가 A가 현실을 회피하는 것을 그대로 반영하는 방식으로서 서사적으로 어울리는 해석이 아닌, 환자가 방어하고 저항하고 있는 면을 돌아볼 수 있게끔 하면서 동시에 A의 서사를 수용하는 해석을 한 것을 눈여겨 보기 바란다. 내가 A에게 했던 말— “그런데 A씨는 그 더러운 것이 세상에서 묻혀온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런가요?”—에서 강조할 것은 환자의 서사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그 속의 저항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리고 A가 지금-여기에서 창조한 서사에서 그의 자아기능이 스스로도 관찰가능한 정도의 전의식(preconscious) 수준의 방어에 집중하도록 했다. 서사적 해석과 저항과 방어 해석의 상호보완이 이루어진 부분이다. 나와 A는 남은 분석시간동안 모든 사람이 그녀에게 조건없는 사랑을 주고 환영해주기를 바라는 소망에 대해 더 이야기했다. 그녀에게 파랑새는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환영받고, 사랑받는 새”였다. 나와 사람들로부터 환영과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느끼고 내가 자기를 포기해버릴 것 같다고 했다. A가 주변사람들과 치료관계에서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인 판타지를 붙들고 치료관계 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가학-피학적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는 해석이 A의 마음에 닿기 위해서는 더 작업이 필요했다. 나는 다음날 A가 또 결석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역시 오지 않았다.
결석 후 다음 세션에서 A는 아버지와 친구가 자기와의 약속을 우선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 얼마나 자신에게 거절감을 느끼게 하는지 울먹이면서 토로했다. “제가 경계선 성격장애인 거 아시잖아요. 그게 얼마나 거절에 민감한지…. 다른 사람들이 이런 나를 이해하지 못하니까 나는 계속 상처받을 수밖에 없어요. 사람들은 몰라요. 내가 거절에 민감한 사람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아무도 몰라줘요.” 나는 그녀의 말을 계속 경청했다. A가 지난 세션에서 나에게 거절감을 느꼈고,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내가 알아줬으면 하는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에 적합한 서사적 해석b을 한다면 A에게 만족스럽겠지만 치료적 변화는 일으킬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그의 저항과 방어로 시선을 돌리게 하여 변화를 일으키는 해석이 A의 마음에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해석은 어떤 것일까? A의 이야기를 모두 다 듣고 그녀의 울분이 잦아들어 침묵에 이르렀을 때 나는 말문을 열었다. “A가 사람들에게 조건없는 사랑을 받고 싶은 마음을 잘 알아요. 그리고 사람들에게 거절당할 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도 이해할 수 있어요. 최소한 가족들, 친한 친구, 또 저에게는 최우선이 되고 싶은 마음이지요. 그것마저도 거절당할 때, 당신은 화가 나고 소리치고 싶지만, 모든 게 차단되어 있는 느낌을 느끼게 되는 것 같네요.” 나는 잠시 멈추어서, A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A는 나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A씨는 이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질적인 질문을 할 것이라는 암시를 하여 준비시킨 후) 당신이 반복해서 결석할 때, 그것이 저에게도 거절감을 느끼게 하고, 당신이 저와의 치료 약속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리라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지 궁금하네요.” 나는 그녀의 고통에 대해 중립적으로 공감했다. 그리고 그녀와 나 사이에 명백하게 지속되고 있지만 그녀가 부정하고 있는 부분을 제시하고 탐색했다. A는 당황했다. 자기를 방어하고 싶은 마음과 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범벅이 되는 것 같았다.
다음 날 A는 치료에 왔다. 그리고 자신의 거짓과 가식에 대해 보다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나를 사랑해달라고 하면서도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 없도록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요. 그런데도 내 감정만 생각하고 싶어요.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어요. 나의 끝없는 외로움과 공허함이 나를 미치게 만들어요.” A의 성찰이 전보다 좀더 진정성있게 느껴졌다. 나는 A에게 더 이질적인 해석도 그녀의 마음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어나갔다. “A가 자신의 모습을 타르가 범벅이 되어 날지 못하고 땅에 떨어진 파랑새로 묘사했었지요? 제가 느끼기에는 사람들의 사랑에 만족을 못하고 의심하는 파랑새가 스스로 타르를 묻히고 사람들을 테스트하는 것 같아요. 나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지 아닌지 확인해보고 싶은 것 같아요. 그래서 당신은 그 타르를 제거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아요. 그 타르가 당신을 심각하게 해칠 수도 있는데도요”라고 말했다. 그녀의 고통은 외부에서 온 것이 아니라, 바로 그녀의 분열된 자아를 통합하지 못하고 투사하는 방어와 그 방어의 탐색을 가로막는 자신의 방어와 저항 때문이라는 것을 해석했다.
A의 치료과정 중의 한 장면을 통해서 양분화된 방법론, 즉 방어와 저항 분석과 서사적 진실의 창조, 양측의 특성과 내재한 한계를 보여주고자 했다. 그리고 이 치료과정은 두 방법론을 상호보완하는 방식의 통합이 가능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환자의 방어와 저항을 면밀히 관찰하면서 이를 분석하는 방어와 저항의 분석은 환자 마음에 이질적이고 거북한 것일 수 밖에 없고, 치료자의 해석이 환자의 심리적 현실에 너무 이질적이면 환자가 바로 튕겨내게 되므로, 모든 맥락을 고려한 점진적인 접근이 필수적이다. 이 점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정신분석적 치료과정이 매끄럽지 못하고 불필요한 마찰이 일어나 급기야 멈춰버릴 수 있다. 이를 위한 두 방법론의 상호보완 방식을 제안하려고 한다.
우선 환자의 방어와 저항을 다루기에 앞서 환자의 서사를 경청하고 공감적인 태도로 접근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 태도에는 환자가 자신의 심리적 현실에 이질적인 해석을 들을 때 불편하고 때로는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질적인 해석을 하기 전에는 환자가 거부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것이 역설적으로 저항을 낮추는데 도움이된다. 예를 들면, “이것은 제 생각이고 A씨는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제 생각을 이야기해보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제 생각이 틀릴 수도 있는데, 저는 이러이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A씨 생각에는 어떤 것 같으세요?” 분석가의 말을 거부하는 것이 허용되기 때문에 다소 편안한 마음으로 분석가의 말을 듣게 되고 그것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조금 더 많아진다. 또는 “혹시 제 말이 A씨에게 지적처럼 들릴 수도 있겠는데, 제 뜻은 A씨를 지적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 같아서 꼭 이야기를 해보았으면 해요. 이야기를 해도 괜찮을까요?”라는 방식으로 환자가 이질적인 해석에 미리 마음에 준비를 하도록 하는 것도 도움이 될 때가 있다. 분석가가 이질적인 이야기를 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고 듣기 때문에 충격을 완충하는 효과가 있다.
두번째로 환자의 서사를 포함하면서 그 속의 저항에 초점을 맞추는 해석을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는 Gray (1982)의 면밀한 관찰 과정(close process attention)과 Spence (1982)의 미적 경험으로서의 서사적 진실 모두가 필요하다. A의 증례에서 내가 한 해석, “그런데 A씨는 그 더러운 것이 세상에서 묻혀온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런가요?”에서처럼, 분석가의 해석이 환자의 심리적 현실에 대한 서사를 활용하면 환자가 받아들이기가 조금 더 용이하다. 동시에 분석가는 환자의 심리적 현실에서 현실을 왜곡하여 갈등을 회피하고 있는 환자의 방어와 이에 대한 인식을 저항하는 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필요하다. 이때 고려해야 할 것은 환자가 스스로 관찰할 수 있는 의식이나 전의식 수준의 방어와 저항에 집중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환자의 자아와 협력할 수 있고 환자는 스스로 관찰하고 생각하고 깨닫게 되는 인지 및 경험의 과정을 통해 치료적 성장과 변화를 이루게 된다.
환자는 자신이 처한 객관적 현실과 갈등을 겪을 때, 이 갈등을 감당할 능력이 없을 경우 갈등을 회피하기 위해, 현실을 왜곡한 심리적 현실 속에 자신을 가둔다. 분석가의 역할은 환자가 자신의 심리적 현실이 실제 현실을 왜곡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갈등에 직면하여 실제 현실과 심리적 현실을 조율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분석가의 해석이 환자의 심리적 현실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도록 부추키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환자의 서사를 경청하여 그의 심리적 현실을 충분히 이해한 이후에는, 자신의 심리적 현실을 고수하면서 실제 현실을 보지 않으려는 환자의 저항과 맞서야 한다. 환자의 서사 속의 저항을 깨닫고 구체적으로 찾아내기 위해서는 환자의 욕구와 두려움, 내적 갈등의 구조, 방어체계 등을 포괄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하여 환자의 서사를 관통하여 바라보고, 환자가 사용한 서사적 틀을 이용하여 환자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으면서도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해석을 할 수 있다. 분석가가 환자에게 제시하는 새로운 서사, 새로운 관점, 새로운 가치체계는 바로 왜곡된 현실, 즉 심리적 현실과 실제 현실을 조율하게 하는 서사, 관점, 가치체계여야 한다. 이 기법은 분석가의 면밀하고 지속적인 관찰과 개입을 요구하는 상당히 수고로운 작업이다. 그러나 환자의 서사적 진실 속에서 방어를 관찰하여 해석하지만, 환자의 서사적 진실을 더 높은(성숙한) 차원의 미적 경험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과정이므로, 궁극적으로 치료자와 환자 모두에게 더욱 큰 성취감을 안겨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번째는 지금-여기, 분석가와 환자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일(전이)을 다루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Gray (1996)는 치료자를 권위의 인물로 인식하는 방어적 전이를 면밀히 관찰하고 이에 대해 지속적인 개입을 하는 것이 환자가 자신의 욕동 파생물을 수용하고 방어의 필요성을 줄이며, 궁극적으로 자아의 성장과 독립을 가져온다고 주장했다. 이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이에 더해 환자가 인식하는 대상관계가 분석가와의 관계에서 역전되는 상호작용을 환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기법적으로 매우 효과적이다. A가 인식하는 대상관계는 자신은 거절당하고 소외당하는 피해자이고 다른 사람들은 자기에게 상처를 안기는 가해자이다. 그런데 나와의 관계에서 오히려 A가 나를 거절하고 고통을 주는 가해자가 되는 역전의 순간을 A에게 보여주었다. 얼마 후 A는 “선생님이 나를 기다리고 거절감도 느낀다는 사실을 떠올렸을 때, 처음으로 선생님이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전까지는 선생님은 그냥 있는 것, 마치 AI 인공지능 같은 느낌이었던 거 같아요”라고 이때의 기분을 설명했다. 그 세션 이후로 A의 결석은 현저히 줄었고 장기간에 걸쳐 실제적인 큰 변화들이 일어났다. 환자가 자신의 방어적 전이를 인식하는 것의 효과 중에서, 자신이 권위자이자 공격자의 피해자인 것만이 아니라, 치료자에게 자신이 공격자와 권위자가 되려는 욕동이 있으며, 이를 역전하여 방어하고 저항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환자에게 매우 큰 울림을 준다. 그러나 때로 이런 해석이 환자에게 큰 충격을 주어 더 큰 저항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에 세심하고 기술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네번째, 서사적 진실의 추구를 수용함으로써 환자와 치료자의 좌절을 극복할 수 있다. 저항 분석으로 치료적 효과를 이루기 위해서는 분석가의 매우 정교하고 세밀한 관찰과 개입이 필요하면서도 당장의 보상과 만족감을 주지 않는다고 여러번 언급했었다. 나 역시 그랬지만, 이는 많은 분석가들이 방어와 저항 분석을 회피하는 큰 이유 중 하나이다. 이를 보완하는 것이 서사적 진실의 추구를 선택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환자의 방어를 저항의 측면만이 아닌, 적응적, 창조적인 측면에서 이해하는 관점을 포함하여 다양하고 보다 흥미롭게 개입하고 보다 설득력 있는 해석을 할 수 있다. 환자가자신의 방어와 저항을 이해하는 인지적이고 학습적인 과정에 치료자의 직관에 따른 미적 창조적 경험을 보탤 때 자아의 성장과정이 가속될 것이다.
Spence (1982)는 “언어는 드러내는 것이자, 동시에 감추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환자가 드러내려는 것과 감추려는 것에 언제나 동시에 귀 기울여야 한다. 분석가의 해석은 환자가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고(Bion 1962), 꿈꾸지 못하는 것을 꿈꿀 수 있도록 하는 것(Ogden 2004)이다. 환자가 생각하지 못하고 꿈꾸지 못하는 것은 방어와 저항의 한 측면이다. Busch (2014)는 정신분석가들이 프로이트의 저항과 철저작업(working through)에 대한 관점을 잃지 않기를 염원하면서, 저항 분석이 철저작업의 핵심이며 이를 통해 지속되는 견고한 변화를 이루어 낼 수 있다고 역설했다. 그는 어떻게 환자가 방어와 저항 분석을 통해 자신의 무의식에 닿을 수 있는지가 정신분석 기법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했다. 거듭 강조하지만 정신분석가들이 환자의 서사를 경청하면서 반드시 방어와 저항의 측면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환자의 저항이 치료과정을 방해하는 것이 너무 공고해지기 전에 저항에 초점을 맞추어 서사적 해석의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나는 해석학적 정신분석가들이 새로운 서사의 창조, 환자와 함께 창조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에 궁극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환자와 함께 창조하는 새로운 서사는 환자가 이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알고 싶지 않았던 서사를 창조할 수 있도록 정신분석가가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정신분석에서 새로운 서사의 창조는 구조이론에 바탕을 두고 환자의 서사에 숨은 저항을 발견하여 이를 환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서사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어야 한다.
요약하면, 나는 이 논문에서 현재 정신분석가들이 어중간한 태도로 저항과 방어분석과 서사적 진실의 창조라는 상반된 정신분석 방법론에 발을 담그고 있는 문제를 명확히 하려고 시도했다. 이런 태도는 분석가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채, 저항과 방어 분석을 회피하고 자신의 역전이를 깨닫지 못하게 하거나, 반대로 방어분석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치료과정을 힘들게 만들어 궁극적인 치료효과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 나는 분석가들이 방법론의 측면에서 양분화된 상태와 그 혼란을 깨달아야 이 문제를 극복하기가 용이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양 방법론 모두 유용하며 동시에 한계를 지니고 있으므로, 저항과 방어 분석과 서사적 진실의 창조를 상호보완하는 방식으로 통합한다면, 현재 정신분석 환경—심한 병리의 환자군이 점차 증가하는—에서 궁극적으로 진정한 치료적 효과를 낳을 수 있는 정신분석 방법론이 될 수 있다고 제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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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현대 해석학은 19세기의 자연과학적 인식론과 세계관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철학계의 움직임으로 20세기에는 철학과 과학, 신학, 예술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영향을 주었다. 이 관점에 따르면 세상과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기존의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닌, 두 주체의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의미와 이해가 창조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세상에 대한 이해란 고정된 개념일 수 없고, 상호작용 속에서 지속적으로 새롭게 창조되는 이해의 연속이다(Palmer 1969). 현대 정신분석은 해석학의 사상과 큰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해 왔다. 해석학적 개념은 자연과학적 방법론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인간의 정신세계에 대한 연구를 보완하고, 때로는 정곡을 찌르는 관점을 통해 정신분석의 발전을 견인했다. 환자를 관찰의 대상으로 하여 치료자의 객관적인 관찰에 의존하던 정신분석을 치료자와 환자의 관계 맺음에서 생겨나는 의미를 함께 발견하는 것으로 정신분석의 과정에 새로운 개념을 더했다. 관심의 중심이 환자의 증상의 원인(cause)에서 환자의 의도(intention), 혹은 이유(reason)와 서사(narrative), 즉 의미(meaning)의 이해(understanding)로 옮겨지면서, 정신분석은 치료의 한 방법에서 인간의 존재론적 이해에 이르기까지 영역을 넓혔다(Lee 2022 발췌).
b저자가 사용한 용어로 환자의 심리적 현실에 서사적으로 어울리는 해석을 줄여 ‘서사적 해석’이라고 하였다.
The author has no potential conflicts of interest to dis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