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와 오비드의 ‘변신’에 따르면 나르시수스는 요정 레이리오페의 아들로 무척 아름다웠고 자신이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16세 되던 해에 남녀 양성 모두에게 구애를 받았으나 모두 거절했다. 나르시수스의 이야기는 여러 이야기에 전해지는데 남의 말을 반복하는 벌을 헤라로부터 받은 에코도 있었다. 나르시수스를 몰래 따라간 에코가 뒤에서 그를 껴안자 그녀를 매몰차게 뿌리치고 달아났고 애원하며 매달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나르시수스는 떠나버렸고 에코는 사랑으로 여위어 목소리만 남게 되었다. 이것이 echo (메아리)의 유래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아메이네우스가 나르시수스에게 사랑을 구하다가 결국 실패하자 아메이네우스는 칼을 집어들고 그의 집앞에서 신에게 복수를 부탁하며 자살을 했다. 탄원을 들은 아르테미스 신이 나르시수스에게 벌을 내렸다. 맑은 우물가에서 물을 마시려고 고개를 숙였는데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해 키스하려 하다가 그것이 자신임을 깨닫고 물속을 마냥 쳐다보며 처음으로 갖고 싶지만 갖지 못하는 것을 애닳게 원하다가 괴로움속에 사망하고 만다. 이것이 나르시수스를 다루는 오래된 이야기들이다.
나르시수스의 이야기를 자기애를 상징하는 인물로 다루면서 일반명사로 만든것은 Ellis (1898)로 ‘auto-eroticism’에서 처음 다뤘다. 이를 Freud (1905)가 ‘성욕에 대한 3개의 에세이(three essays on the theory of sexuality)’에서 처음 인용하였고, 1914년에 ‘자기애에 대해(on narcissism)’를 발표하면서 정신분석에서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Freud 1914).
자기애적 인격은 지나친 자신에 대한 집착과 타인의 무시, 공감의 결여를 특징으로 하는 이기적 인격유형이다. 정상에서 병적인 수준까지 스펙트럼을 형성한다.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편람 5판(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Fifth Edition, DSM-5)에서 정의하는 자기애적 인격장애는 우월감(과대성)을 느끼고, 관심과 경탄, 존경심을 필요로 하며, 공감 능력이 떨어지며, 상호관계에서 착취적 패턴의 만연함을 특징으로 하는 정신상태다. 본인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본인의 업적을 과장하며, 타인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 2013).
DSM-5나 국제질병분류 10판(International Statistical Classification of Diseases and Related Health Problems 10th revision)에서 정의하는 ‘자기애적 인격장애’는 병적이며 부적응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진단분류기준이 정신병리를 분류하고 질환을 정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World Health Organization 2004). 그에 반해 정신분석적 측면에서 본다면 자기애적 인격은 정상에서 병적인 수준에 넓게 분포되어 있다고 본다. 정신발달적 측면에서 모든 이에게 일정 수준의 자기애는 필요하며, 자아를 보호하는 기능을 하기에 건강한 자기애의 발달은 필수적이다. 인간은 누구나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있고, 적당히 과장된 자신에 대한 평가를 한다. 생존을 위해 타인에 대한 공감보다 자기 중심적 인식과 판단을 하는 것은 필요한 요소다.
병적인 수준의 자기애, 혹은 자기애적 인격구조로 인한 정신기능의 문제점들은 20세기 중반이후 Kohut가 자기심리학을, Kernberg가 악성 자기애에 대한 본격적 논의를 하면서 정신분석과 정신치료에서 중요한 주제로 부각되었다.
자기애적 인격유형이 두드러진 사람은 그와 관련한 주변인들이 지속적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그리고 여러 이유로 정신치료의 세팅에 참여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 인격적 특성으로 인해 치료자와 의미있는 치료적 관계를 형성하기 힘들고, 전이를 통한 치료적 변화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자기애적 인격은 기본적으로 자기 중심적이고 공감능력이 결핍되어 있으며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반응을 기대한다. 그러나 치료적 관계는 거꾸로 치료자의 권위를 인정하는 의존적 관계를 형성해야 하고, 자신의 내적 치부나 기억하지 못하는 억압된 감정이나 기억이 의식표면으로 올라와 치료자에게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을 감내해야 한다. 하지만 이들은 치료자를 독립적인 존재로 경험하지 못하며, 오직 자신의 완벽한 내적 세계를 이상화하는데 적합한 면만 투사할 수 있을 때 치료자의 존재를 인정한다. 무엇보다 ‘자신이 약한 존재이고, 결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병식의 기본이며 내적 변화의 시작이다. 자기애적 인격을 기본 인격구조로 갖고 있다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전제조건이다. 그렇기에 상대적으로 오랜 치료 기간에도 불구하고 치료의 진전이 없거나 매우 더딘 경우가 많고, 전이 형성이 안되고, 부정적 역전이의 대상이 되거나, 해석에 부정적 반응을 하고 치료관계 자체가 위협을 맞기도 한다(Jang과 Ha 2022).
치료적 관계에서도 이와 같은 어려움이 있기에 자기애적 인격을 가진 사람의 인격적 성숙과 성찰을 기대하는 것이 자연히 일어나기를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청년기부터 시작해서 중년과 노년기를 지나면서 전체적으로 자기애적 성향은 잘 바뀌지 않고 유지되면서 대인관계에서 지속적으로 착취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며, 사회적으로 갈등을 일으키나 미안해하지 않고, 이를 지적하는 이에 대해서 매우 강한 반응적 보복을 하는 것을 반복한다. 외로움이나 우울을 경험하지 못하고, 대인관계에서 깊은 수준의 애착과 친밀함을 위해 필요한 상호의존의 경험을 하지 못한다. 이런 특성은 중년과 노년기까지도 비슷한 양상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자기애적 인격특성이 두드러진 이들을 여러 이유로 관찰을 하다보면 임상에서 특별한 치료적 중재없이 인격구조 변화의 터닝포인트를 목격하게 될 때가 있다. 바로 이들이 상실을 경험하고 이에 대한 반응을 하는 지점이다. 대상의 상실은 인생주기에 피할 수 없는 중요한 이벤트의 하나다. 자기애적 인격을 가진 사람에게도 상실은 예외가 없다. 그렇지만 자기중심적이기에 이들은 상실을 부정하고 진지한 애도를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매우 중요한 대상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거나, 그 대상을 상실했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깨닫고 인식하게 되었을 때 그의 정신세계를 구축하고 있던 자기애적 인격의 단단한 틀에 균열이 생기면서 처음으로 인격구조의 변화를 꾀할 시점이 되기도 한다.
이런 점에 주목하여 연구자들은 Yoko (2002)의 동화 ‘100 만번 산 고양이’를 텍스트로 하여 자기애적 인격을 가진 자가상실을 대하는 방법의 일반적 경향을 관찰하고, 상실과 진지한 애도가 자기애적 인격의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과정에 대해서 정신분석적 분석을 할 것이다.
사노 요코는 일본의 작가, 에세이스트, 그림책 작가다. 1938년 중국의 베이징에서 7남매 중 장녀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내고, 전쟁이 끝난 후 일본으로 돌아왔다. 무사시노 미술대학 디자인과를 졸업하고 1967년 유럽으로 건너가 독일베를린 조형대학에서 석판화를 공부한 후 1971년 『일곱장의 잎—미키 다쿠 동화집』으로 데뷔했다. ‘100 만번 산 고양이’ 이외에 많은 그림책, 창작집, 에세이집을 발표했고, 일본에서 많은 상을 수상했는데, 2003년 일본 황실로부터 자수포장을 받았고, 2008년 이와야사자나미 문예상을 받았다. 2010년 유방암으로 72세에 사망하였다.
백 만년이나 죽지 않는 고양이가 있었다. 그 고양이는 백 만번 죽고 백 만번 다시 살아난 것이다. 백 만명의 사람이 그 고양이를 귀여워했으나 고양이는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 한때 고양이는 임금님의 고양이였는데 고양이는 임금님을 싫어했다. 싸움솜씨가 좋은 임금님은 전쟁터에 데리고 나갔다가 고양이가 날아온 화살에 죽자 전쟁을 그만두고 성으로 돌아왔다.
고양이는 이렇게 다시 태어나서 뱃사공, 써커스단, 도둑, 홀로 사는 할머니, 어린 여자아이의 고양이가 되었는데, 매번 여러 일로 죽고나면 데리고 살던 사람은 너무나 슬퍼했지만 고양이는 죽는 것 따위가 아무렇지 않았다. 고양이는 다음에는 길고양이가 되었고 처음으로 자기만의 고양이가 되었다. 자기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모든 암고양이가 그 고양이의 신부가 되고 싶어했고 여러가지 선물을 했지만 “난 백 만번이나 죽어봤다고”하며 심드렁해 하였다.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좋아했던 것이다. 그러다 하얀 고양이를 만났고, “내가 곁에 있어도 될까요”라고 말하며 다가가 사랑을 했다. 마음에 들기 위해 공중돌기까지 했다. 이제 두 고양이는 함께 지내기 시작했고 새끼 고양이를 낳아서 길렀다. 시간이 지나 하얀 고양이가 할머니가 되었고 함께 오래오래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하얀 고양이가 늙어 죽어 버렸다. 고양이는 처음으로 울었는데 밤이 되고 아침이 되도 그칠 수 없었다. 한참 지나 고양이는 울음을 멈추고 하얀 고양이 곁에서 조용히 숨을 거뒀고 두 번 다시 되살아나지 않았다.
저자들은 사노 요코의 ‘100 만번 산 고양이’를 재료로 하여 고양이를 자기애적 인격구조를 가진 인간에 대한 비유를 담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 고양이의 행동을 자기애적 인격의 특징적 행동과 대응으로 보았다. 이를 정신분석적 이론을 이용하여 응용정신분석(applied psychoanalysis)의 방법론으로 분석하였다(Ha와 Cho 1996).
이짧은 동화에 나오는 주인공 고양이의 모습은 ‘자기애적 인격’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볼 부분이 많다. 자신이 뛰어나게 아름답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다른 이들이 그를 숭배하고 좋아하는 것을 무척 당연하게 여기고 이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 다른 이가 자신보다 중요한 존재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해서 임금이 그를 아무리 사랑해도 고양이는 그를 싫어했다. 자신이 누구보다 영리하고 아름답고 중요하다고 여기고 타인이 자신을 부러워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무엇보다 공감능력이 떨어지고 타인의 죽음 뿐 아니라 자신이 죽고 난 다음에도 이를 죽음이자 영원한 헤어짐과 상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바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백 만번 반복했다.
고양이가 백 만번 죽고 다시 태어나서 살아가면서 임금, 뱃사공, 써커스단, 도둑, 홀로 사는 할머니, 어린 여자아이 등 수많은 이들과 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이들과 깊고 진실한 친밀한 관계를 만들지 못했다. 그랬기에 그가 죽었을 때 그와 함께 하던 이들은 깊은 슬픔에 잠겨서 중요한 전쟁을 그만두기도 하였지만, 고양이는 아무런 슬픔 없이 다시 새로운 삶에서 관계를 만들었다.
고양이가 흰고양이를 만나기 전까지의 관계는 도구적 관계로 볼 수 있다. 서로를 독립적 존재로 인정하지 않고 인간은 고양이를 ‘귀여움’이란 만족을 주는 존재로 보았고, 고양이 또한 인간을 자신의 필요와 이득을 위해 존재하는 존재로만 인식하였다. 즉, 각자 도구적 관계로 서로를 이용한 것이다. 이와 같은 도구적 관계는 자기애적 인격구조를 가진 이들의 대인관계의 특징이다. 고양이의 자기애는 이런 백 만번에 걸친 도구적 관계가 축적되면서 더욱 강화되었을 것이다. 상징적으로 해석하면 자기애적 인격유형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자기애적인 면을 상대에게 강하게 투사하고, 그와 관계를 맺는 대상도 그의 전체적 정신기제는 그러하지 않는다 해도 이를 투사적으로 동일시하면서 자기애적 도구적 관계가 더욱 강화되는 결과를 가져오기 쉽다.
자기애적 인격을 가진 사람(나르시시스트)은 다른 사람을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개인으로 보지 않고 자신의 하위 시스템이며 이용할 도구로 보기 때문에 관계에서 자신의 책임을 인식하기 어렵다(Rubinstein과 Timmins 1979). 이들은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관찰이 불가능하고 자신의 정신역동적 변화의 패턴과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충분한 객관성을 발휘하기 어렵기 때문에 자기 인식의 발달이 차단된다. 이는 공감과 친밀함의 결여로 이어지기 때문에 타인의 아픔과 애정의 욕구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렇기에 타인의 감정과 판단, 행동을 통해 새로운 행동을 배우는 것이 어렵고, 자신이 한번 구축한 세계관과 행동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척 어렵다. 성인이 된 후 충분히 변화의 기회가 있음에도 자신이 만들어놓은 일차적 자기애의 환상을 실현하고 있는 환상의 세계에 머무른다. 어린 시기부터 구축한 유아적 자아이상의 요구가 현실적이지 않기에 이를 현실에서 만족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반복해서 이를 기대한다. 그러므로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는 그의 내면과 세상에 대한 인식은 실은 무의식적 좌절로 가득차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성찰적으로 인식할 수 없기에 그 좌절감을 경험하지 못한 채 이해하기 힘든 불안의 존재는 무의식적으로 인식하고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더욱 적극적으로 자기애적 환상을 지켜내기 위한 방어적 태도에 몰두하고, 관계에서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거나 자신의 실수나 결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런 정신역동이 결과적으로 자기애적 인격의 비현실적인 완벽한 자아상을 환상안에서 구축하고 지켜내도록 한다. 이는 온전하지 않고, 상처를 주고받을 수 밖에 없는 현실의 대인관계를 어렵게 만든다. 그래서 상호의존을 하는 것을 토대로 하는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자기애적 인격에서 그의 자기애적 환상을 충족시킬 수준으로 완벽한 타인이 존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런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자신의 내면의 완벽함을 훼손하게 되는 논리적 모순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외부의 존재를 독립적으로 자율적인 존재로 인정하는 것은 무척 어렵고, 오직 이용할 대상으로 보거나, 자신을 숭배하거나 존경하고, 자신의 이득에 따라 행동하는 대상으로 파악하는 것에 익숙하다.
고양이는 자신과 함께 지내던 이들이 자신의 죽음에 무척 슬퍼했던 것과 달리, 정작 본인이 죽었고 영원히 그들과 헤어지게 되었음에도 바로 다음 생을 시작하는데, 이것은 자기애적 인격을 가진 이들의 대인관계 경향을 묘사한 것이다.
자기애적 인격의 구조를 가진 이들은 실제 삶에서도 이와 같이 친밀하고 진지한 관계를 맺는데 어려움을 갖는다. 가족이나 친지, 친구와 같이 중요한 대상을 상실하는 상황에도 애도와 슬픔과 같은 일반적 상실의 반응을 하지 않고 부정하는 경향이 있다. 현실에서는 타인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애도로 생전에 인식하지만, 동화에서는 자신이 매번 사망하고, 다시 태어나는 고양이의 삶을 묘사하는 것으로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백 만번의 죽음을 반복하는 것이 타인의 죽음을 목격하며 자신은 영생을 지속하는 것이 자기애적 환상을 유지하는 것을 형상화하는 데에 더욱 적합한 설정일 수 있다. 그런데 이 동화는 고양이가 죽고 그와 그 생에 함께 하던 이들이 모두 슬퍼하는 설정이다. 이는 다른 관점에서 보면 더욱 자기애적 측면을 두드러지게 하는 설정이다. 가까운 타인의 죽음은 자신이 컨트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예측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이는 자기애적 환상에 위협이 된다. 이런 일을 직면하지 않을 방법 중 하나가 자신이 죽고 그들과 헤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멸의 전능감을 유지하지는 못하지만 이 생의 삶을 자신이 관장하고 있다는 차선의 전능감을 만족시킨다. 그런 면에서 ‘100 만번 산 고양이’에서는 고양이가 죽고 다시 태어나는 상황을 반복하는 것으로 묘사한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근본적이고 무의식적인 강력한 자기애는 훼손되지 않은 채 간직하며 생이 반복될수록 강화되었을 것이다.
타인의 죽음 뿐 아니라 자신의 죽음 또한 동등하게 중요한 대상과 영원히 헤어지는 일이다. 그러나 전능함의 핵심은 불멸과 불사이고 완벽한 상태가 훼손되지 않는 것이다. 자기애적 인격구조의 핵심은 전능함의 환상을 유지하는 것이고, 그 환상이 깨지는 것을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방어한다. 그런데 가까이 지내던 대상을 영원히 다시 보지 못하게 되는 분리 상태가 되는 죽음은 자기애적 측면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건이다. 근본적인 자기애적 환상을 갖고 있는 경우 애도과정을 충분히 거치기 어려운 이유다(Frosch 2014).
중요한 대상을 잃을 수 있고 일시적 헤어짐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 영원히 다시 만나거나 이어지지 못한다는 것은 자기애적 관점에서 보면 현실의 존재로서 한계를 절실하게 경험하는 일이다. 특히 일반적인 실패, 좌절에 비해서 훨씬 큰 심리적 영향을 줄 기회다. 그런 면에서 죽음은 자기애적 세계관에 대한 중요한 도전이다. 불사초를 찾거나 죽지 않는 방법을 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던 고대의 황제들의 행태도 자기애적 인격구조가 체화된 이들이라는 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결국 죽을 수 밖에 없고, 그 대상이 자신일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성숙의 한 요소다. 이를 수용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애도를 할 수 있고 잃어버린 대상을 자기 안에 내재화하거나 떠나 보낼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부정하거나 죽음을 초월하려고 하는 욕구를 현실에서 유지하려는 모습을 지속하는 것은 건강하지 않은 악성 자기애적 인격의 정신구조 요소의 하나다.
고양이가 매번 새로 태어나는 방식으로 자신의 죽음을 부정하고 타인의 애도를 회피하는 것을 반복하는 것은 이와 같이 자기애적 인격이 할 수 있는 죽음의 본질을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방어적 태도였다. 현실의 삶은 한계가 있고 불가피한 영원한 헤어짐을 받아들여야 함에도 강한 자기애적 환상은 자신이 그리고 있는 완벽함과 불멸의 상태를 유지하기를 원하고 그 환상이 어긋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현실을 부정하고 자기애적 무의식적 구조안에서 형성한 내적 정신세계안으로 퇴행한채 지내게 되면 자기애의 패배를 최대한 미룰 수 있다. 그 결과 자신과 다른 사람 모두가 완벽하고 자신의 욕구를 완벽하게 충족시킬 수 있는 이상적인 현실의 내면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으로 인식을 변형시킨다. 그러면 피할 수 없는 실망을 감정적으로 분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Frosch 2014). 이런 기전으로 단단한 자기애적 인격을 가진 이는 견디기 어려운 상실을 경험하거나, 죽음에 직면하게 된다해도 죽음과 상실을 수용하지 않고 자기애적 환상을 유지하는 적극적 방어로 전환하는 대처를 하는 것이다.
자기애적 인격이 청소년기에 시작해 두드러지게 관계, 사회활동 등에 부적응적 면을 보이지만, 본인은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다가 중년기에 접어들면서 전반적으로 문제가 되는 감정반응, 판단, 행동이 다소 줄어드는 경향을 임상에서 관찰하고는 한다. 특히 이들이 우울함을 호소하는 것은 자기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후회와 죄의식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호전의 신호로 간주하기도 한다. 청년기에 비해서 중년기에서 장년기로 넘어가게 되면 가족, 부모, 친구, 지인 등 가깝다고 할 수 있는 관계에서 불가피하게 이들의 죽음을 맞닥뜨릴 빈도가 확연히 증가할 수 밖에 없다. 이런 경험을 아무리 적극적으로 방어하고 부정한다고 해도 결국 변화의 한 계기로 작용하기에, 이 연령대를 지나면서 서서히 자기애적 인격의 구조가 자연히 이전 시기에 비해서 적응적인 면을 보이는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고양이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타인의 애도를 인지하지 않은 채 바로 백 만번을 다시 태어났다. 자기애적 인격의 특성 중 하나는 불멸을 지향하는 전능감을 핵심으로 하고 있기에 죽음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살아가면서 중요한 대상의 죽음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인 ‘애도’를 충분히 해야함에도 그 과정의 결핍을 가져온다. 결국 자아의 성숙과 발달, 그리고 정상적 기능을 하는데 부정적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
Tyson (1983)은 발달 단계에 따라 상실에 대한 내적반응이 다르다고 했다. 모든 연령대에서 죽음, 재난, 이혼 등으로 중요한 관계의 상실을 경험한다. 특히 소아는 발달단계에 따라 죽음과 헤어짐을 다르게 반응하고 죽음을 이해하고 인식하는 방식이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기의 심리 성숙정도나 핵심적 발달단계를 평가할 때 상실의 경험을 했을 때 어떻게 인식하고 반응하고,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관찰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 이를 통해 현재의 기능, 상실 자체에 대한 즉각적 반응, 발달과정에 초기 경험이 주는 영향 등을 구별해서 평가할 기회가 된다(Rangell 1967).
자라면서 분노의 감정을 외부로 분출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잘 통제할 수 있지만, 죽음에 대한 소망은 다양한 형태로 지속된다(Freud 1928). 이혼하고 부모 중 한 명이 떠나는 것을 자신을 버린 것으로 여기기도 하고, 자기가 잘못해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여긴다. 이 중 하나를 자기애의 강한 상처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때 다음과 같은 패턴을 볼 수 있다. 첫째, 자신이 부모가 거둬들이고 인정할 만큼 충분히 훌륭한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받아들이며 이후 거짓자기를 비합리적일 정도로 강하게 형성하는 방향으로 발달하는 것이다. 이는 자기애적 면을 강화한다. 둘째, 이와 연관해서 자기애적 상처를 다시 경험하지 않기 위해 병적인 자기애를 더욱 강화하면서 이후에 중요한 대상과 관계를 맺는 것, 그리고 이들과 불가피하게 헤어지는 상실의 경험을 적극적으로 부정하며 필요한 애도를 하지 않는다. 결국 대상의 상실은 현실의 자기애적 구조에 반복적인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부정하면서 죽음의 불가피성을 수용하고 다음 단계의 성숙과 발달로 이어지는 과정으로 나아가지 못하며 강한 자기애적 구조가 유지된다.
일반적으로 무의식은 상실을 받아들이는 것을 처음에는 거부하고 마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은 듯 행동하게 한다(Freud 1917). Freud (1917)는 mourning and melancholia에서 애도과정은 일종의 과잉기억을 동반한다고 했다. 상실한 대상과 함께 했던 경험을 다시 되새기면서 그 기억들을 강박적으로 수집하고 상상하는 것으로 그가 눈앞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대체하려 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관계의 가치를 더욱 깨닫고 잃어버린 대상을 서서히 그 기억과 함께 내재화하면서 자신의 내면세계에 저장한다. 애도의 중요한 과정이다. 이때 자기애가 강할수록 이 과정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상실한 대상과 관련한 과잉기억이 공고한 자기애적 세계안으로 밀려들어오는 것에 혼란스러울 수 있고, 그 혼란을 경험하지 않기 위해 이를 부정하는 방어를 하게 된다. 애도가 힘들어지면 자기의 다른 한 부분으로 기능하는 타인을 인식하는 자기애적 가정(assumption)이 작동하게 된다(Ogden 2002). 대상 상실에 애도를 잘 하지 못할때 심한 우울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 Freud가 제시한 우울증의 역동이었다. 그런데 자기애적 인격을 가진 개체의 경우 우울로 유도될 가능성이 자기애로 인해 적다. 그렇기에 애도도 우울도 이루지 못한 채, 대상의 상실에 대한 어떤 작업도 하지 못한 채 머무르게 된다.
반면 우울(melancholy)은 ‘버려진 대상과 자아의 동일시’ 를 통해 잃어버린 타자와의 연결을 강화한다. 이러한 동일시를 통해 상실된 타자를 위한 형상을 만들고 이 형상을 자아로 끌어들여 상실된 타자의 흔적을 자아의 살아있는 부분으로 내면화하는 수단을 사용하고 그 안에 머무르며 현실과 교감이 줄어든다. 이 역시 좋은 정신기능은 아니다(Freud 1917).
그렇기에 상실을 맞이한 사람에게 건강한 애도라는 작업은 꼭 필요하다. Freud는 애도자가 “살아 있음으로써 얻는 자기애적 만족의 총합에 설득되어 사라진 대상에 대한 애착을 끊게 된다”고 보았다. 결국 애도는 ‘자아에게 계속 살도록 유인을 제공’함으로써 잃어버린 대상을 포기하도록 유도한다. 그런면에서 애도의 중요한 기능 하나는 손상된 자기애를 복구하는 것이기도 하다(Clewell 2004). 왜냐하면 애도에 갇혀있거나 애도를 전혀 시작하지 못한 사람의 다른 징후가 환멸, 새로운 이상화의 반복적인 순환이 한 사람의 삶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애도를 하지 못하거나 우울증으로 가지 못하는 것은 반복적으로 자기애적 인격구조를 더욱 강화할 뿐이다.
고양이는 애도를 하지 않고 다음 삶을 반복해서 살아갔기에 자기애의 구조를 지속했다. 이는 무의식적 반복강박(repetition compulsion)을 묘사한 것이며 Freud는 쾌락원칙보다 우세하다고 하였다(Freud 1920). 그러던 중 흰고양이를 만나면서 변화가 일어난다. 처음으로 의미있는 관계를 갖고 친밀하고 소중한 대상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흰고양이가 사망하자 처음으로 고양이는 죽음을 슬퍼하게 되었고 목놓아 울다가 죽어버린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지 않게 되었다.
그 계기는 고양이가 이전의 도구적 관계와 달리 진정한 정동을 주고받는 ‘친밀함’과 ‘애정’을 온전히 경험하고, 상대를 독립적 관계로 인정하면서도 불안해하거나 이용만 하려고 하지 않는 관계를 흰고양이와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흰고양이는 ‘내 곁에 있고’, ‘늘 붙어서 지내며’, 고양이와 ‘새끼를 낳고 기르는 것’은 일반적 자기애적 자아에서는 인정할 수 없거나 가치를 두지 않는 행위다. 그러나 고양이가 흰고양이와 맺은 관계는 무척이나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을 공유하는 것이었다. 이전의 백 만번의 관계와 가장 다른 점이었다. 이때부터 고양이에게 타인과의 관계가 그의 삶에 중요한 가치가 되었고 비로소 관계의 상실이 갖는 슬픔을 처음으로 경험하게 된 것이다.
저자 중 한 명은 임상에서 알코올 의존증으로 반복하는 환자들을 진료하면서 자기애적 인격구조의 변화를 관계의 측면에서 관찰한 바 있다.
반복적으로 입원을 하는 알코올 의존증 환자들은 매우 강한 자기애적 측면을 갖고 있고, 이를 강하게 부정하며, 내면의 우울을 감추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들에게 인지치료를 기반으로 한 상담이나 교육은 뚜렷한 효과가 없는 사례가 더 많고 치료자에게 좌절을 경험하게 한다. 이들의 삶은 자기파괴적이나 문제에 대한 통찰보다 부정과 회피, 자기애적 방어가 두드러진다. 이들을 끝까지 돌보는 부모를 포함한 가족에 대한 미안함이나 감사보다 입원을 시켰다는 사실에 집착하여 분노를 쏟아부을 도구적 관계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이는 치료자도 마찬가지다. 오직 자신이 왜 술을 다시 마실 수 밖에 없는지를 설명하고 환경에서 원인을 찾는 투사와 합리화의 기제가 갑옷과 같이 그의 자기애적 자아를 둘러싸고 있다. 그래서 가족의 질병, 죽음과 같은 일이 일어나도 애도를 표현하지 않고 방어적 태도를 유지하거나 분노를 투사할 대상으로만 여기고는 한다.
이들의 이런 패턴이 변화하는 것은 교육이나 인지적 노력이 아닌 자신을 위해 진짜 걱정을 해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정서적 관계가 만들어졌을 때다. 이는 자신의 의도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보다 우연한 기회로 시작되는 경우가더 많다. 그러나 비슷한 대상을 만나게 되더라도 그의 내면의 변화가 일어날 계기가 만들어지는 것은 이전의 인생사에서 그가 의식적으로 인식하지 못하지만 감정적 변화나 흔들림이 올만한 사건 이후에 생긴다. 이는 그 시점에는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나, 정신치료 등을 통해 후향적으로 돌아볼 때 비로소 그 시점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전에 도구적 관계로 이해하던 대상과의 관계를 처음으로 친밀한 대상과 일상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주는 기쁨과 안정감을 느끼는 관계로 인식하게 된다. 비로소 환자는 현실에서 힘든 상황을 만날 때마다 알코올이 제공하는 퇴행의 공간으로 돌아가는 행위를 멈추고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임상관찰은 고양이가 흰고양이를 만나면서 처음으로 친밀하고 서로를 염려하는 관계를 맺고, 그렇기에 흰고양이를 매우 중요한 대상으로 받아들이면서 자기애적 인격의 구조적 변화가 일어날 계기를 가질 수 있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고양이는 백 만번 다시 사는 동안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중요한 대상의 발견을 흰고양이와 함께 지내며 처음으로 경험하였다. 그 대상을 온전히 의미있는 대상으로 내면에 받아들였기에 흰고양이의 죽음을 영원한 상실일 수 있다는 것을 직면한 것이다. 동화에서는 고양이가 슬퍼하다가 죽는 것, 그리고 다시 태어나지 않게 되었다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그동안 시도하지 못했거나 적극적으로 방어했던 것이다.
그만큼 애도를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개체에게 중요한 대상의 인식과 그 대상의 상실은 매우 중요한 심리적 모멘텀이 될 가능성이 있다. 자기애로 방어하던 개체가 상실의 고통을 처음으로 제대로 경험하고, 그동안 부정하고 회피하던 상실을 인정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를 통해 멈춰있던 자기, 대상관계의 항상성을 구축하고, 자기-대상을 구별하는 발달과정을 재시동할 수 있다.
동화에서 고양이는 처음으로 죽은 후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결말이지만, 현실의 삶으로 이 동화를 대입해보면, 갑옷과 같이 단단하던 자기애적 인격구조에서 상실을 인정하고 애도하는 과정을 반복적으로 부정하던 개체가 드디어 중요한 대상을 인정하고, 그 대상의 상실을 받아들이고 처음으로 애도를 하게 된 것이다. 이는 자기애적 인격 구조에 균열을 가져오면서 긍정적 성숙과 발달의 과정을 다시 시작할 계기가 된다.
고양이가 흰고양이를 중요한 대상으로 인식하고 비로소 흰고양이의 죽음을 계기로 진정한 애도를 하게 되며 공고한 자기애적 구조의 균열이 일어난 것의 기저에는 ‘사랑’이 있다. 사랑이란 자신의 자기애를 사랑한다고 여기는 대상에 투사해서 자신이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로 자기애적 만족을 얻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을 경험한다는 것은 나 이외에 소중한 존재가 있고 그를 자신을 위해 이용하거나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존재한다고 여기기보다 중요하고 동등한 존재로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Rosegrant 2009). 더 나아가 사랑을 하는 만큼, 상대를 소중하고 친밀하게 여기는 만큼 자기애적 만족도 함께 일어나는 경험을 한다.
고양이는 흰고양이에게 “내가 당신과 있어도 되냐”고 묻는다. 자기애적 구조가 강한 이는 자신의 취약성이 드러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그가 안전하다고 여기는 거리안으로 타인을 들이지 않는다. 나의 선택이 실패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은 자기애적 구조에서는 선택을 드러내고 하기 어려운 요소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전에 백 만번의 관계는 자신의 선택이 아닌 타인들이 고양이를 선택했었다. 내가 한 선택이 아닌 외부의 선택에 의한 관계라고 볼 때 그 관계가 끊어진다고 해도 슬퍼하거나 애도를 할 이유가 없다. 그렇지만 고양이는 흰고양이에게 함께 있기를 원하고 그걸 자신의 선택이자 결정으로 일방적으로 통보하지 않고 정중하게 묻는다.
거절 당할지도 모르고 흰고양이와 오랫동안 함께 옆에서 지내는 것이 자신의 숨기고 싶던 혹은 인식하지 못했던 취약한 점이 드러날 위험이 있다. 또 흰고양이가 기대와 달리 치명적 문제가 있을 수도 있어서 자신의 선택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자신이 다른 존재에게 의존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상황이 바로 ‘내가 당신 곁에 있어도 될까’라는 질문이었다. 이를 흰고양이가 수락하면서 고양이는 처음으로 현실적인 대상과 서로 의존하고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 의존성을 보인다고 자아가 무너지거나 약해지거나 착취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경험하고 깊은 정서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는 현실에서 그러한 관계를 발달 단계에 부모와 맺지 못했고, 성인기에 반복적으로 자기애적 문제로 인해 의미있는 정서적 친밀한 관계를 갖지 못하던 이가 정신분석적 치료를 하는 과정에 치료자와 전이를 경험하고, 안전한 치료적 환경안에서 서서히 해석과 통찰을 경험하고 훈습을 하면서 변화하는 과정을 경험하는 치료적 변화와도 유사하다.
일방적인 자아의 자기중심적 확장이 아닌 이타적이고 상호의존적인 관계가 질적으로 다른 만족을 주는 것이다. 자기애적 인격구조가 사랑을 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고, 사랑을 하고, 애정하는 대상의 상실을 수용하고, 죽음이란 영원한 상실을 경험하는 것이 공고한 자기애적 인격구조 변화의 중요한 요소로 작동한다(Lager 2010; Kim 2021).
저자들은 사노 요코의 ‘100 만번 산 고양이’를 텍스트로 주인공 고양이를 자기애적 인격구조를 가진 존재로 상정하였다. 여러 번 죽고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거치면서 한 번도 죽는 과정의 삶 안에서 맺은 주요한 대상과의 관계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고양이는 이들과 헤어질 때에도 슬퍼하거나 애도를 하지 않는다. 이는 자기애적 인격구조가 기본적으로 불멸과 전능함의 유지의 환상을 갖고 있기에, 죽음을 자기애에 대한 강한 도전으로 인식한 것이다. 그 결과 상실의 상황을 직면할 때 인정하지 못하고, 애도와 슬픔과 같은 일반적 반응을 적극적으로 방어하는 것으로 전능감을 토대로 하는 자기애적 인격을 유지하며 반복강박적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와 같은 적극적 방어와 부정은 중요한 대상의 죽음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인 ‘애도’를 충분히 해야함에도 그 과정의 결핍을 가져온다. 결국 자아의 성숙과 발달, 그리고 정상적 기능을 하는데 부정적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 이로 인해 자기애적 인격구조는 생애 전반에 걸쳐 변화하지 않고 공고하게 작용하며 자아의 기능, 사회적 기능, 관계 등에 어려움을 가져올 수 있다. 고정된 인격구조의 변화는 장기간 정신분석적 치료를 받는 것으로도 쉽게 이루어지기 어려울 수 있지만 한편으로 인생사의 중요한 사건이 계기가 될 때도 있다.
저자들이 텍스트로 선정한 ‘100 만번 산 고양이’의 고양이에게는 처음 사랑하는 대상으로 인식한 흰고양이의 죽음과 강렬한 애도가 매우 단단하던 자기애적 인격 변화의 강력한 동기로 작동했다. 이제는 슬픈 감정을 충분히 온전하게 경험하게 되면서 고양이가 이전에 그랬듯이 피학가학적인 관계를 반복강박적으로 재시작하던 패턴을 더이상 반복하지 않아도 되는 치유적 변화가 온 것이다. 이는 정신분석적 치료의 과정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 그리고 대상에 대한 정서적 관계를 형성하며 그 대상의 상실을 경험하고, 진정한 애도의 과정을 경험하는 것은 단단하던 자기애적 인격의 급격한 변동과 성숙과 발달로 이어지는 균열을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다.
None
The authors have no potential conflicts of interest to dis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