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듣기는 정신과 의사가 사용하는 가장 기본적인 도구다.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는 환자를 도와주기 위해서는 먼저 환자의 사례에 대한 이해를 시도해야 하며, 이 과정에서 듣기는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정신과 전공의에게 널리 알려진 정신분석 관련 교과서에서는 정신치료 중 듣기에 관련해서는 자세히 기술되어 있지 않으며, Psychoanalytic Electronic Publishing (PEP) web에서 ‘분석적 듣기(analytic listening)’ 라는 제목으로 1980년대 이후로 검색하면 총 39편의 논문만이검색되었다. 그래서 저자는 정신분석적 듣기가 일상생활의 듣기와 다른 점이 무엇이고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연구해 보았다.
정신의학 임상 영역에서 환자의 병리를 이해하는 데 무의식적인 정신병리 기제가 포함되기 마련이기 때문에 정신분석적 듣기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병리기전을 파악하고 질병의 원인을 추적해 치료하는 연역적인 추론 방식에 익숙한 의사들은 해석학적 방법에 더 가까운 ‘정신분석적 듣기’에 관심이부족하다. 여기서 해석학적 방법이란 객관적인 관찰을 통해서가 아니라 두 주체가 대화와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경험과 새로운 의미를 찾는 것을 의미한다(Lee 2022). 그리고 뇌과학과 정신의학이 발달하면서 현대 정신분석학과 같은 해석학적 방법으로 환자를 이해하기보다는 연역적인 방법으로 환자를 이해하기를 더 선호하는 기조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하지만 정신과 환자의 증상은 주관적이며 고유한 무의식적 충동과 관련되어 있어서 ‘정신분석적 듣기’를 배제하고는 환자의 무의식적 정신병리를 이해할 수 없어 공감적 치료환경을 조성하기 어렵다. 그래서 정신분석가가 되고자 하는 경우뿐만 아니라 정신과 전공의 또한 임상진료를 할 때 더 수준 높은 의료행위를 행하기 위해서 정신분석적 듣기에 대한 수련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현재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로 정신분석적 정신치료 지도감독을 받으며 정신치료 중 듣기에 대한 태도에 변화가 생겼다. 지도감독을 통해 경험한 정신분석적 듣기 그리고 정신분석적 듣기를 탐구하면서 환자의 정신병리를 이해하고 병리적 현상을 치료하는데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임상사례를 들어 소개하고자 한다. 나아가 현대물리학인 양자역학적 개념을 통해 정신분석을 새로이 이해하고, 이러한 양자역학적 개념을 정신분석적 듣기에 적용하고자 한다.
정신분석은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이며,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한 틀로서 프로이트가 선택한 출발점은 무의식이었다. 또다른 정신분석의 중요한 가설로는 정신결정론이 있으며, 이는 어떤 사람의 행동이나 생각 그리고 감정은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동기와 이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Gabbard 2014). 다시 말하면 원인없는 결과는 없다는 것이며, 이미 어린 시절의 경험에 의해 그 동기가 결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신분석학이 만들어질 당시 과학계에서 보편적 진리로 받아들여진 뉴턴 역학적인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Epstein 1987; Morstyn 1989). 뉴턴역학에서는 관찰자와 관찰 대상이 명확하게 구별 지어지고, 관찰자인 실험자는 어떤 특정 값으로 치우쳐지지 않게 중립을 지키는 실험 환경에서 원인과 결과를 찾기 위한 실험을 계획한다. 하지만 정신분석 실제에서는, 분석상황의 분석가의 자아가 관찰하는 자아이기도 하지만 경험하는 자아가 있어서(Sterba 1934) 명확하게 관찰자와 관찰대상이 나뉘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정신분석의 기본적 가설인 무의식이라는 개념이 받아들여지기 전까지는 사람들은 의식 너머에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었다. 진공이라는 개념도 마찬가지로 뉴턴고전역학에서는 아무 물질도 없다는 것을 뜻했지만, 양자역학에서는 불확정성의 원리에 따라 진공은 에너지가 0인 상태가 아니며 물질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을 반복하고 있다고 한다(Beiser 2002). 양자역학에서 진공의 에너지가 0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듯이, 의식이 도사리지 않는 진공의 공간 같은 무의식에서도 정신적 에너지가 작동하고 있고, 원자아와 초자아와 같은 상반되는 힘들이 왔다 갔다 반복하고 있다고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정신치료 중 정신치료자가 침묵을 듣는 것에 대해 많은 논의들이 이루어졌는데, 우리는 이미 침묵이 오히려 발화하는 순간보다 더 큰 무의식적 의미를 담을 수도 있음을 경험적으로 알아차리고 있다(Akhtar 2013).
양자역학은 원자, 전자 등의 미시적 대상에 적용되는 물리학이다. 그리고 기존의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의 가장 큰 차이점은 자연 현상에 ‘관찰자’를 끌어들였다는 점이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아주 작은 미시 세계의 대상들은 관찰자의 여부에 따라 다른 결과를 도출한다. 예를 들어 전자는 관측하지 않을 때는 물결과 같은 ‘파동’으로 존재하다가 관측하기 시작하면 야구공과 같은 ‘입자’인 것처럼 행동한다. 이 말은 우리가 관찰하지 않을 때는 양자가 파동의 형태로 눈에 보이지 않다가어떤 의도를 가지고 바라볼 때 입자의 성질을 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현상은 고전역학적 관점으로는 받아들일수 없는 것으로, 상식과 너무나 다르고 현실 세계에서 경험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이를 이해하기 위한 해석이 따로 필요하다.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양자는 여러 상태가 확률적으로 겹쳐 있는 파동함수로 존재하고 있다가, 관찰자가 측정을 시작하면 파동함수의 붕괴가 일어나면서 하나의 상태로 결정된다. 이는 고전역학에서 입자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움직이는지 알 수 있는 것과 명백히 상반된다. 양자역학에서는 입자가 어느 순간, 어느 곳에 있는지 단지 확률로만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입자들의 최종 위치는 결정적이지 않으며 절대적인 우연을 따른다. 이렇게 입자의 운동량과 위치를 동시에 알 수 없는 것을 ‘불확정성 원리’라고 하며 양자역학의 핵심 개념 중 하나다. 그리고 측정하기 전까지 확률적으로 여러 상태가 동시에 존재하는 현상을 양자중첩이라고 한다. 이러한 입자의 확률을 파동함수로 표현하며, 파동함수의 크기는 입자에게 허용된 에너지 양자를 고려하여 결정되기 때문에 항상 0보다 커야 한다. 양자역학자들은 이와 같은 양자 현상을 증명하여 몇 백년간 과학을 지탱했던 고전뉴턴역학의 ‘결정론적 세계관’을 무너뜨렸다.
양자의 자연현상은 우리의 상식과 너무 달라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양자역학의 예측은 놀랍게도 정확하게 들어 맞아 현대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널리 응용되고 있다. 양자역학의 대표적인 결과물로는 레이저,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반도체 그리고 자기공명영상장치(MRI)가 있다(Li 2018). 또한 생물학이나 화학 등에서 양자역학의 개념을 접목해 양자생물학, 양자화학 등으로 연구되고 있다. 더 나아가 양자역학의 주요 개념은 현대의 정신과의사들과 정신분석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설리반은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에 영향을 받아 ‘참여하며 관찰(participant observation)’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Sullivan 1953). Morstyn은 기존의 뉴턴역학적 관점으로 정신분석을 바라보면 경계선환자의 정신치료 과정에 부족한 점이 있어서, 양자역학적인 관점으로 정신분석을 이해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Morstyn 1989). Gargiulo는 분석가와 환자의 상호작용을 ‘양자 얽힘(quantum entanglement)’으로 설명하였다(Gargiulo 2016).
양자얽힘은 양자역학적으로 존재하는 상관관계로, 둘 사이의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양자 법칙에 의해 양자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상호작용을 뜻한다. 양자 얽힘은 우주를 구성하는 것들이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Rosenblum과 Kuttner 2011). Gargiulo는 양자얽힘 개념에 빗대어, ‘나(I)’가 독립적으로 따로 존재하지 않고 맥락 속에서 존재함을 강조하였다(Gargiulo 2016). 국소적 실체를 믿었던 아인슈타인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우리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믿었고, 양자얽힘 현상을 ‘말도 안 되는 유령 같은 원격작용(spooky action at a distance)’이라 칭하며 부정하였다(Rosenblum과 Kuttner 2011). 하지만 현대 물리학자들은 두 개의 양자 사이의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 연결되어 상호작용하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였다.
무의식이 여태껏 자연과학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던 이유는 무의식적 사건들이 관찰될 수 없다는 기본 전제 때문이었다. 하지만 현대의 양자역학에서는 고전역학에서 배제되었던 관찰자를 끌어들여 여태껏 관찰될 수 없었던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고전역학에서 실험을 고안한 관찰자의 의도를 배제하였듯이, 전통적인 정신분석에서는 분석가가 자신의 주관성을 배제하고 중립을 지키는 관찰자로서 존재했다. 그리고 1980년대 중반 이후, 분석가의 절제와 중립성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인식되기 시작하며, 상호주관성이 강조되기 시작되었다(Choi 2008). 관찰자의 의도를 포함시키면서 물리학자들이 기존의 결정론적 관점에서 비결정론적인 양자역학적 관점을 가지게 된 것처럼, 현대정신분석은 분석가의 주관성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면서 발전해 왔다. Gargiulo는 이러한 유사점들을 발견하고 양자역학적 개념으로 정신분석을 새로이 이해하여 ‘양자 정신분석(quantum psychoanalysis)’이라이름 붙였다. 정신분석학자들이 양자역학적 개념을 도입해 무의식을 새롭게 이해했듯이, 과학자들 또한 양자역학적 수식으로 무의식을 표현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Tomic (2020)은 마테-블랑코의 복논리 개념(Bi-logic concept)을 양자 논리(quantum logic)를 이용해 수식으로 표현하였고, Iurato (2018)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컴퓨터과학에 접목하여 계산정신분석학(computational psychoanalysis)으로 발전시켰다.
이렇게 양자역학과 정신분석학 사이에 여러 공통점이 존재하여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이를 통합하여 이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두 분야 모두에 정통한 전문가를 찾기가 어려우며, 학문간 건설적인 교류가 적어 이론으로 그칠 뿐 임상에 적용되는 예는 찾지 못했다. 그래서 저자는 양자역학적 개념으로 정신분석을 다시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임상실제에 적용하는 방법을 탐구하였다. 환자가 정신분석 과정 중 ‘자유연상’을 통해 일상적 말하기와 다른 말하기를 하는 것처럼, 정신분석가 또한 들을 때 일상적 듣기와 다르게 분석적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환자의 말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우리의 생각이나 감정, 가치관 등을 투과시켜 인식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임상가가 들을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것을 더 잘 듣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말은 잠재적으로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으며, 한 가지 이상의 방식으로 들을 수 있다. 그리고 환자가 한 말의 의미는 항상 듣고 있는 임상가에 의해 결정된다. 그래서 저자는 양자역학적 개념을 적용하여 분석적 듣기를 다시 살펴보고자 한다.
이논문에서 표현하는 ‘듣기’란 ‘정신분석적 듣기’를 말하며 정신분석 또는 정신치료 과정 중에서 정신치료자의 듣기를 말한다. 정신분석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는 피분석자의 무의식을 살펴본다는 점에서 일상생활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와 확연히 다르다. 그리고 환자가 표현하는 무의식적인 의미는 임상가에게 직접적으로 전달되지 않고 숨겨져 있어서 정신분석적 듣기를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여태껏 많은 정신분석가들이 듣기에 대해 말했으며, 그 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두 인물은 프로이트와 비온이다. 프로이트는 “위에서 골고루 살피는 주의력(evenly hovering attention, Gleichschwebende Aufmerksamkeit)”을 제시하였고, 치료자는 환자가 말한 것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말로 전달되지 않는 비언어적인 표현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하였다(Freud 1912). 그리고 비온은 가장 순수한 듣기는 “기억이나 열망을 가지지 않고 듣기(listen without memory nor desire)”라고 하였는데, 정신분석적 관찰(psychoanalytic observation)은 어떤 일이일어났거나 앞으로 일어날 일이 아니라 현재 일어나는일과 관련된 것이어서 과거의 일이나 앞으로 일어날 것이라 기대되는 것을 배제하고 들어야 한다고 하였다(Bion 1967).
양자역학에서는 단지 측정된 결과들을 토대로 유추해서 해석할 뿐, 양자 파동은 그 자체로 관측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여러 가지 가능성이 중첩되어 있기 때문이다(Omn`es 1999). 이는 정신분석에서 무의식적 의미가 중층 결정되어 있고, 분석상황에서 말실수나 꿈, 그리고 전이와 같은 것으로 무의식적 의미를 유추할 수밖에 없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무의식을 양자 파동에 빗대어, 의식은 양자 파동의 확률 중 한 가지라 볼 수 있다(Gargiulo 2016). 그리고 ‘양자 듣기’는 수많은 가능성 중 단 한 가지를 현실로 경험하여 듣는 것인데, 분석가의 관찰하는 자아(observing ego)는 ‘양자 듣기’ 과정에 영향을 끼쳐 확률 분포 중 한 가지를 택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의식적일 수도 있고 무의식적일 수도 있다. 그래서 ‘양자 듣기’는 분석가 자신이 어떤 과정을 통해 무의식적 의미를 유추했는지를 살펴보아서, 무의식의 또 다른 의미를 의식 수준에서 경험할 수 있도록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자 하는 것이다.
다음은 P와의 대화 내용을 옮긴 것이며, 환자는 P, 치료자는 T로 표시하겠다. 저자는 실제 이 대화를 나누던 중 P의 말을 듣고 생각했던 것과 지도・감독을 통해 다시 바라보게 된 점들에 대해 공유하고자 한다. P는 멀리서 사는 여동생이 술에 취한 채 쓰러져 있다는 전화를 받았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P는 직접 여동생을 데리러 갈지 고민했으나 데리러 가지 않았다. 그리고 경찰에 신고하는 건 찝찝해서 신고하지 않았다고 한다.
T: 데리러 올라갈까 했지만 올라가지 않으셨고, 경찰신고는 꺼려져서 하지 않았어요. 그러고 나서 내가 잘했나? 찜찜하세요. 경찰신고는 어째서 꺼려졌나요?
P: (… 3분 정도의 침묵) 모르겠어요. 경찰에 신고해도 도와줄 것 같지 않았어요. 출동도 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 그리고 이런 걸로 신고해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경찰에 대한 이미지가 안 좋긴 해요. 이전 직장에서 자주 경찰하고 통화할 일이 있었거든요. 그때 경찰이 아주 불성실하고 저한테 자주 짜증을 냈어요. 그리고 신고하면 왠지 여동생한테 피해가 갈 것 같아서요.
T: 어떻게 여동생한테 피해가 갈 것 같았나요.
P: 그냥 피해가 갈 것 같았어요. 신고를 하게 되면 여동생이 피해를 받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그냥 들었어요.
P는 그동안 “선생님이 날 혼낼 것 같다.”라며 막연한 불안감을 호소하였고, 치료자에 관한 생각을 물으면 “선생님에 대해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해요.”라고 말하며 치료자에 대한 불신이 있었다. 그리고 치료자의 파견근무 전 치료를 중단하려고 하여, 얼굴을 맞대고 치료하다가 인터넷 화상회의로 정신 치료를 이어 나가던 중이었다. 그래서 P가 “경찰에 신고해도 도와줄 것 같지 않았어요.”라고 하자 이전에 P가 “치료를 더 받아도 나아질 것 같지 않아요.”라고 했던 게 떠올랐다. 그래서 저자는 “‘경찰이 날 도와주지 않을 것 같다는 마음에 신고하지 않으신 것처럼 선생님도 날 도와줄 수 없어. 그러니까 치료를 그만둘래.’라는 마음이 드는 건 아닐까요.”라고 P에게 해석해주었다.
그리고 지도・감독을 받으면서 “경찰에 신고해도 도와줄 것 같지 않았어요.”라는 말을 다르게 해석해볼 수 있었다. P와 저자는 대면으로 치료를 이어 나가다가 비대면으로 하고 있었는데, 치료자와 P가 화상전화를 하는 것처럼 P 또한 여동생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화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회기에서 나눴던 대화는 치료자와 환자와의 전이를 드러내기도 하고, 치료과정에서 대면에서 비대면으로 바뀐 변화를 반영해주기도 하였다. 또한 이 대화는 P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P는 어릴 적 부모님의 불화로 정서적으로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부부싸움이 있을 때마다 어머니가 P를 내버려 두고 여동생과 함께 집을 나간 적이 많았다고 한다. 아무도 자신을 돌보지 않고 도움을 주지 않았던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에 “경찰이 도와주지 않을 것 같다.”라고 말한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렇게 지도・감독을 받기 전에는 저자는 P와의 대화를 치료자와 환자와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전이 해석에 초점을 맞추어, 치료과정 중 일어난 변화나 환자의 어린 시절의 상처와 연결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도 감독을 통해 하나의 대화를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으며, 여러 가지 해석을 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앞서 제시한 임상 사례처럼 저자는 듣는 와중에 P와 나와의 관계에만 집중했기 때문에 P의 말을 듣고 그와 관련된 해석을 해주었다. 그렇게 된 순간 이후부터는 ‘경찰에 대한 불신’이 ‘치료자에 대한 불신’으로 보이게 되어 이후에도 전이 감정에 관한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나는 여기서 게슈탈트 심리학에서 폐합의 법칙(Law of Closure)을 떠올렸다. 폐합의 법칙에 따르면, 떨어져 있는 부분들을 합해서 하나의 도형으로 인식한다고 한다. P가 ‘경찰을 믿지 못하겠다.’라는 얘기는 원래는 그렇지 않았지만, 그 말을 듣는 내가 ‘치료자인 나를 믿지 못하겠다.’라고 해석하며 다른 의미를 동시에 가지게 되었다. 이처럼 환자가 내뱉는 말 이면의 속뜻을 정신치료자는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어서, 정신치료자가 어떻게 듣느냐에 따라서 앞으로의 치료과정에 큰 차이를 줄 수가 있다.
위 사례처럼, 일상생활에서의 듣기와 달리 정신 치료에서 이루어지는 듣기는 능동적이고 참여적이며 적극적인 사고 과정이 일어난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 듣느냐에 따라서 해석을 달리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정신분석적 듣기는 양자역학의 논리로 설명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다음은 정신분석적 듣기에 적용해 본 양자역학의 개념들이다.
• 양자중첩(quantum superposition)은 가장 근본적인 양자현상으로, 둘 이상의 양자 상태가 측정되기 전에는 여러결과가 확률적으로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측정은 관찰자의 측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종류의 상호작용 모두를 뜻한다고 한다. 이렇게 여러 확률적으로 동시에 존재하는 것을 확률 파동이라고 부르며, 확률 파동은 측정되는 순간 중첩 상태가 붕괴해서 하나의 상태로 보이게 된다(Griffiths와 Schroeter 2018). 이것을 정신분석에 적용해보면, 분석상황에서 정신분석가와 피분석자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무의식적 의미가 달리 해석될 수 있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해석을 하기 전에는 모든 무의식적 의미가 확률적으로 존재해서 한 가지로 결정되어 있지 않다.
•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위치가 정확하게 측정될수록 운동량의 불확정성 또한 증가하고, 반대로 운동량이 정확하게 측정될수록 위치의 불확정성도 커지게 된다(Griffiths와 Schoreter 2018). 이것을 정신분석에 적용해보면, 정신치료자가 의식적인 면에 치우치면 무의식적 의미를 놓칠 수 있고, 무의식적인 면에 치우치면 현실의 문제를 놓칠 수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정신치료자가관찰자로만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관찰자와 관찰되는 자로 나뉘어 존재할 수 없고, 정신치료자 또한 그 상황에서 관찰되고 있는 것이다. 설리반은 이와 비슷하게 정신치료자가 참여하며 관찰(participant observation)하여, 정신치료자가 관찰하면서 그 상황에 참여하고 있다고 하였다(Sullivan 1953).
위와 같은 양자역학의 개념을 통해 무의식이 어떻게 해석되고 작동하는지 다시 이해해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양자역학적 개념을 정신 치료 실제에 적용하여 무의식적 의미를 다양하게 이해하고자 하는 것을 ‘양자 듣기(Quantum Listening)’라정의하고자 한다.
무의식에서는 일생의 중요한 사건이 실제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 중요한 사건은 무의식 구조 내에서 실제가 아닌 환상의 형태로 재조작되어 반복강박의 형태로 나타난다. 앞서 소개한 임상 사례에서 P는 어머니가 어릴 적 자신을 버린 중요한 사건으로 인해 타인이 자신을 무시하며 버릴 것이라는 무의식적 환상이 존재했다. 그리고 이러한 환상의 시나리오 안에 치료자를 끌어들여 치료자가 또다시 자신을 버리는 시나리오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P는 치료자가 파견근무를 갈 때 자신을 버리고 떠난다고 믿고, 치료자의 파견근무가 시작되기 전에 치료를 그만두려고 했었다.
겉으로만 보기에 P의 치료 중단 결정이 객관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치료자는 파견근무 일정을 얘기해주면서 비대면으로라도 치료를 이어나가자고 제안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치료자가 P를 떠난다고 얘기한 적이 없다. 하지만 P의 무의식적 세계에서는 치료자가 파견근무를 간다는 사건 그 자체가 변수가 되지 않고, 당시 저자와 P 사이에 일어났던 전이와 같은 상호작용이 변수가 되었다. 그리고 이 변수는 P의 무의식적 환상을 자극하여, 어머니가 자신을 버렸을 때 느꼈던 감정을 재경험하게 되었다.
이처럼 무의식의 세계에서는 사건의 전후가 모호하며 다음의 사건을 예측하기 어렵다. 무의식의 구조를 어떤 함수의 구조라고 쳤을 때, 시간이나 사실과 같은 변수가 작용해서 예측이 가능한 값을 나타내는 선형함수처럼 작동하지 않는다. 정신분석 상황에서는 치료자와의 상호관계나 치료 과정의 흐름 그리고 예전에 경험했던 어린 시절의 중요한 정서적 경험들과 같은 다양한 변수가 작동하고, 아주 미묘한 변화에도 정신분석 과정은 아주 다르게 흘러갈 수 있어 결과가예측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환자의 무의식적 구조에다양한 변수들이 적용되면서 환자가 가진 고유한 시나리오로 치료자를 끌어당긴다고 이해할 수 있다.
P를 예로 들자면, 그녀의 무의식에 존재하는 시나리오 줄거리는 누군가가 누군가를 버리는 것이므로, 치료자인 내가 그녀를 버리지 않는다면 결국에 그녀가 치료자를 버리는 식으로 어떻게든 누군가는 버림을 받게 되는 식이다. 환자가 가진 무의식의 시나리오 속 대사를 잘 들을 수 있게 되면, 정신치료자는 그 대사의 의미에 의문을 가지고 스스로 새로운 질문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되면, 관찰자인 관객의 입장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고, 그 시나리오의 줄거리를 예상하고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치료자가 환자를 향한 역전이감정으로 피로함을 느낄 때, 무의식에서 되풀이되어 문제를 일으키는 상호작용과 그 내용을 잘 관찰할 수 있다면, 새로운 각도에서 상황을 바라볼 수 있어 환자와 대립하지 않고 협력할 수 있게 된다.
환자들은 오랫동안 알고 있었지만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가지고 온다. 그리고 정신치료자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면서, 환자가 여태껏 생각지 못한 면들을 볼 수 있게 해주어 증상이 해결되곤 한다. 환자에게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주기 위해서는 앞서 말했듯이 환자의 무의식 속 대사를 잘 들을 수 있어야 하고, 이 논문에서 제시하는 ‘양자 듣기’는 이와 같은 무의식 속 대사, 즉 대화 속 맥락을 더 잘 파악하기 위함이다. 스스로 같은 질문을 두 번 했을 때는 다른 누군가에게서 두 번째 의견을 구할 때의 10분의 1 정도의 판단 개선 효과를 얻는다고 한다(Vul과 Pashler 2008). 그래서 저자는 같은 질문을 여러 번 던지면서, 아예 다른 질문 또한 던질 수 있다면 더 정확하고 유용한 해석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정신치료자가 환자의 말을 들으면서 무엇을 들었는지 보다 어떻게 들었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같은 질문에 다양한 답을 내리는 시도를 하면서도, 또 다른 질문을 떠올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연과학에서는 무게나 속도를 정해진 척도에 따라 정량적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정신 치료에서 주로 다루어지는 감정이나 생각 등은 더 추상적인 척도에 따라 판단된다. 그리고 정신 치료 중에 일어나는 대화에서는 그 척도의 범위가 맥락의 기능을 한다. 예를 들어, ‘오늘 하루 열심히 보냈어요.’라는 문장은 상황에 따라 의미하는 바가 크게 달라진다. 말하는 사람이 응급실 의사인지, 가정주부인지에 따라서도 이 말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고, 이것을 듣고 있는 청자가 어떻게 듣느냐에 따라 의미가 또 달라진다. 누군가의 추정값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에 근거하여 결정적으로 선택된 값이라기보다 내부 확률 분포의 샘플이라고 한다(Vul과 Pashler 2008). 이처럼 정신치료자가 들을 때는 모든 지식이나최선의 지식을 적용해서 듣지 못한다. 그 순간에 들리는많은 것들 중 하나에 집중하게 되며, 그 외의 것들은 듣지 못하게 된다. 정신 치료에서 적용되는 추상적인 척도의 범위를 상황에 따라 조절할 힘이 정신분석가에게 주어진다면 분석의 방향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정신 치료 내 대화에서 적용되는 추상적인 척도의 범위가 고무줄처럼 늘어났다가 줄어들 수 있다면, 정신치료자는 더욱 다양한 것을 들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저자는 이 척도의 범위를 조절할 수 있는 것에 ‘양자 듣기’를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생각한다. 양자역학적 개념을 빌리자면, 자신이 듣는 것이그 말 그대로 확실하고 확정적인 것이 아니라, 어떻게 듣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불확실성과 불확정성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양자 듣기’는 무의식을 양자역학의 개념을 통해 다시 이해하여, 정신치료자가 환자의 무의식적 현실에 색다른 질문을 던질 수 있게 하고자 한다. 그리고 색다른 질문은 대화의 맥락을 더 폭넓게 이해하게 해주어 무의식을 더 심층적으로 탐구할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저자는 정신분석적 듣기가 양자 듣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1900년에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 을 출판하여 무의식과 정신분석학을 세상에 알렸을 때 플랑크 또한 ‘양자’라는 개념을 제시했다(Klein 1961). 그리고 놀랍게도 양자역학과 정신분석학이 닮은 점이 많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양자역학을 설명하기 위한 여러 이론 중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양자는 입자와 파동의 성질을 동시에 가지고 있지만 이 두 상태를 모두 보여줄 수는 없고 파동의 성질만을 보여주거나 입자의 성질만을 보여준다고 하며 이를 상보성의 원리라고 부른다(Omn`es 1999). 이 말은 우리가 관찰하지 않을 때는 양자가 파동의 형태로 눈에 보이지 않다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바라볼 때 입자의 성질을 보여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양자의 세계에는 상식과 너무나도 다르고 현실 세계에서 절대로 경험할 수 있는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이를 이해하기 위한 해석이 따로 필요하다.
양자역학의 논리는 다른 여러 분야에도 적용되어 발전을 거듭해오고 있으며 정신세계를 이해하는 것에 적용이 시도되고 있다.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영국의 이론물리학자 로저 펜로즈와 미국의 마취과 의사 스튜어트 해머로프는 조화 객관 환원(orchestrated objective reduction 또는 Orch-OR)이라는 사람의 의식을 설명하기 위한 가설을 세웠다(Penrose와 Hameroff 2011). 조화 환원 이론은 뉴런 안의 미세소관을 구성하는 중합체 사슬의 튜불린 하위 단위들이 다양한 구성 상태의 중첩을 이루고 있고, 이 중첩이 임계 질량 밀도에 도달하면 파동 함수가 붕괴하여 의식을 경험하게 된다고 한다.
의식이 발생하는 과정을 양자역학의 논리로 설명할 수 있듯이, 무의식 또한 양자역학적 관점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무의식을 양자역학의 확률파동(probability waves)으로, 환자와 분석가의 상호작용을 양자 얽힘(quantum entanglement)을 통해 설명하기도 한다(Gargiulo 2016). 양자역학이 있는 그대로 이해되기 어려워 여러 해석이 필요하듯, 무의식 또한 의식적으로 떠올릴 수 없어서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이론과 해석 그리고 분석가와 오랜 대화 속에서 자신의 무의식을 탐구해 나가는 경험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의식의 사고는 의식적으로 이해하기에 아주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경우가 많은데 이는 꼭 양자의 성질이 이해되기 어려운 것과 비슷하다.
훌륭한 정신치료자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것을 듣더라도 다른 것을 듣고 또 그것을 말한 이에게 돌려주어 일깨워 주는 사람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리고 정신치료자가 어떻게 관찰하느냐, 즉 어떻게 듣느냐에 따라 정신 치료의 과정은 확연히 달라질 것이다. 무의식을 양자역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아마도 무의식적 현상을 이해하는 데 실행 가능한 유용한 과학적 제안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정신분석의 과정 또한 양자역학적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하였고, 이러한 관점을 통해 무의식적 의미를 탐구하는 정신분석적 듣기를 ‘양자 듣기’라 정의하였다. 저자는 이 논문에서 현대의 양자역학적 개념을 통하여 정신분석의 주요 가설인 무의식에 대해 다시 이해해보고, 정신분석적 듣기에 적용하고자 ‘양자 듣기’라는 개념을 제안하였다. 향후 ‘양자 듣기’ 개념이 임상실제에 활용되며, 정신분석 과정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틀로서 새로운 통찰을 제공해 줄 수 있기를 바란다.
자신의 사례를 논문에 제시하도록 동의해준 P씨에게 감사의 뜻을 표한다.
The authors have no potential conflicts of interest to disclose.
Conceptualization: Ji Sun Yang, Chang-Hun Lee. Data curation: Ji Sun Yang. Formal analysis: Ji Sun Yang. Funding acquisition: Ji Sun Yang, Chang-Hun Lee. Investigation: Ji Sun Yang. Methodology: Ji Sun Yang. Project administration: Ji Sun Yang, Chang-Hun Lee. Resources: Ji Sun Yang. Supervision: Chang-Hun Lee. Validation: Chang-Hun Lee. Visualization: Ji Sun Yang. Writing—original draft: Ji Sun Yang. Writing—review & editing: Ji Sun Yang, Chang-Hu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