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eud는 1910년 처음으로 ‘자기애’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으며, 이후 일차성 자기애와 이차성 자기애로 이를 분리하여 개념을 정립하였다(Ku와 Yu 2010). Freud 이후, Klein, Kohut, Kernberg 등 수많은 정신분석학자들이 자기애에 대한 연구를 이어나갔다. 그 중 Kohut은 1966년 ‘Forms and transformations of narcissism’ 논문을 시작으로 전통적인 정신분석에서는 볼 수 없던 개념들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으로 자기대상(selfobject)의 개념을 도입하여, 자기대상 전이(selfobject transferences)를 통해 이전까지 잘 치료되지 않던 자기애적 성격장애 환자를 치료하였다. 또한 Kohut는 ‘Introspection, empathy, and psychoanalysis’ 논문에서 공감(empathy)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며, 공감은 치료 행위로서 뿐만 아니라 비의식의 발견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였다(Kohut 1959; Lee 2011).
본 논문에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다니엘 크레이그 주연의 ‘007 시리즈’를 통해 자기애성 성격을 이해하고자 한다. 영화에 그려진 주인공 제임스 본드의 삶을 Kohut의 자기심리학적 관점에서 이해함으로써 자기애성 성격장애의 치료적 함의를 찾고자 한다.
영국 첩보 조직 ‘Military Intelligence Section 6 (MI6)’의 요원인 제임스 본드는 악당 ‘르쉬프’의 테러를 저지한다. 르쉬프는 실패를 만회하고자 거액의 상금을 건 포커 게임을 개최한다. 본드는 테러 배후를 밝히고자 이에 참여하고 영국 재무부 직원 ‘베스파’의 도움으로 우승한다. 본드는 함께 역경을 이겨낸 베스파와 사랑에 빠져 은퇴한다. 베스파와의 행복한 은퇴생활을 즐기던 본드는 포커 게임의 상금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된다. ‘비밀 조직’에게 협박을 당하고 있던 베스파가 벌인 일이었다. 결국 베스파는 스스로 죽음을 택하고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본드는 깊은 슬픔에 잠기게 된다(Campbell 2006).
본드는 볼리비아의 물을 독점하려는 악당 ‘그린’의 계획을 알고 이를 저지한다. 본드는 그린의 계획에 영국 등 강대국의 권력자들이 동참하고 있으며, 이들이 ‘비밀 조직’에 속해 있음을 알게 된다. 본드는 베스파를 조종해 돈을 빼돌린 남자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후 베스파가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Foster 2008).
임무 중 MI6의 국장인 ‘M’의 지시로 죽을 위기에 처한 본드는 잠적한다. M에게 버려졌다고 느낀 그는 좌절감에 빠져 살던 중 MI6 본부에 테러가 발생한 소식을 듣고 돌아온다. 술 문제 등으로 인해 임무가 불가능했던 본드는 M의 도움으로 복귀해 테러의 배후인 ‘실바’를 검거한다. 하지만 실바는 이내 탈출하여 또다시 M을 죽이려 한다. 본드는 M과 함께 실바를 처치하지만 부상을 입은 M은 결국 사망한다(Mendes 2012).
본드는 르쉬프, 그린, 실바가 모두 ‘스펙터’라는 비밀 조직임을 알고 조사하던 중 스펙터의 리더 ‘블로펠드’를 만나 혼란에 빠진다. 블로펠드는 부모를 잃은 본드를 돌봐주던 ‘한스 오버하우저’의 아들이었으나 한스와 함께 눈사태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사실 블로펠드는 자신보다 아버지의 총애를 받는 본드를 질투해 아버지를 죽이고 잠적한 것이었다. 본드는 스펙터를 쫓던 중 정신과 의사 ‘마들렌’을 만나는데, 자신처럼 부모를 잃고 불안정한 삶을 살아온 그녀의 사정을 알게 된다. 본드는 마들렌과 함께 스펙터를 와해시키고 블로펠드를 죽일 기회를 얻지만, 불안정한 요원으로서의 삶보다 마들렌과의 안정된 삶을 선택한다(Mendes 2015).
블로펠드에게 속아 마들렌과 이별 후, 5년 간 요원 활동을 하지 않고 있던 본드는 신체 접촉만으로 살인이 가능한 무기 ‘헤라클레스’가 테러범 ‘사핀’에게 탈취당하자 복귀한다. 복귀 후 본드는 마들렌과 우연히 만나 오해를 풀고, 그녀가 홀로 키우던 ‘마틸다’를 만난다. 본드는 마틸다가 자신의 딸임을 알고 행복과 책임감을 느끼지만 이내 사핀에게 마들렌과 마틸다를 빼앗긴다. 연인과 딸을 되찾고 싶다면 임무를 포기하라고 협박하는 사핀을 처치한 본드였지만 이 과정에서 헤라클레스에 감염된다. 자신으로 인해 마들렌, 마틸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본드는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Fukunaga 2021).
Kohut는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공감적이고 적절히 반응해주는 어머니와 연결되어 있는 상태로 태어난다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며 어머니가 완벽하지 못함을 깨닫는다고 보았다. 어머니와의 완벽하게 행복한 상태를 회복하길 바라는 아기의 마음이 ‘자기애적 욕구’로 표현된다. 아기 스스로가 완벽하다는 ‘과대 자기’와, 어머니를 완전한 존재로 보고 아기가 어머니의 한 부분이라는 ‘이상화 부모 이마고(imago)’가 그것이다(Kohut 1966; Kohut 1971; Kohut와 Wolf 1978). Kohut는 추후 과대자기의 한 부분으로 보던 ‘쌍둥이 자기애적 욕구’를 따로 구분하여, 총 3가지의 자기애적 욕구에 대해 설명하였다. Kohut는 각각의 자기애적 욕구에 적절하게 공감하고 반응하는 것, 즉 적절한 자기대상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자기의 발달에 필수적이며 자기애적 환자의 치료에 중요하다고 보았다(Kohut 1984).
이상화 부모 이마고는 완벽한 대상의 한 부분이 되어 완전함을 얻고자 하는 욕구이다. 아기는 이상화 자기대상을 통하여 이상화 부모 이마고를 충족시켜 안정감을 되찾으며, 완벽한 대상과의 분리는 파편화된 자기를 야기하기도 한다. 다만, 부모가 아이에게 평생 완벽한 존재일 수는 없다. 아이는 자라나며 부모의 유한성을 깨닫고 실망하며 좌절하게 된다. 이과정이 점진적으로 일어나면 아이는 이상화 자기 대상의기능을 스스로 할 수 있게 내재화한다. 이와 달리 아이가 갑작스럽게 이상화 자기대상을 상실하거나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좌절을 하게 되면 아이는 최적의 내재화를 하지 못한다. 아이는 필요한 내적 구조를 획득하지 못하게 되며 그의 정신은 원초적 자기대상에 고착된 상태로 남게 된다. 그 결과 아이는 일생동안 늘 대상을 갈망하면서 여러 대상들에 의존한 채 살아갈 수 밖에 없게 된다(Kohut 1966; Kohut 1971).
본드의 일생에는 부모, 한스 오버하우저, M이라는 이상화 자기대상의 역할을 수행하는 자들이 존재하였다. 본드는 초등학생 무렵 스카이폴이라는 저택에서 부모와 함께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모종의 사건으로 본드의 부모는 누군가에게 살해당하며, 사건 당시 본드는 살아남기 위해 저택의 비밀 공간에 이틀 간 홀로 갇혀 있었다. 이런 감당하기 어려운 좌절을 초등학생이던 본드는 겪게 되었다. 이후 임시 후견인 한스가 본드를 돌보게 된다. 그는 본드를 물질적으로 모자람 없이 뒷받침했을지는 몰라도,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거나 친아들 프란츠 오버하우저(이후 스펙터의 블로펠드)에게 괴롭힘 당하는 것에 개입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즉, 본드의 생각과 감정에 충분히 공감하고 반응해주는 인물은 아니었던 것이다. 당시 본드가 의지할 수 있을만한 인물은 한스 뿐이었지만, 프란츠가 질투심에 한스를 살해하여 본드는 또다시 이상화 자기대상의 존재를 잃게 된다.
한스의 사망 이후 본드는 누구에게 의지할 곳 없이 지냈고, 홀로 살아가는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군인이 된다. M에게는 사용하다가 사건이 생기면 버리기 쉬운 고아, 본드가 요원으로 제격이었다. M에 의해 MI6 요원으로 발탁된 본드는 탁월한 능력으로 살인면허를 부여 받아 007이 된다. 본드는 오만하고 독단적인 성격으로 인해 임무 완수를 위해서라면 M의 지시를 어기는 일을 거리낌 없이 하였다. 이로 인해 본드는 M과 갈등을 빚게 되지만 그럼에도 M은 본드가 위기를 극복하도록 여러 차례 도움을 주었다. 이전까지 타인에게 도움을 받거나 의지하는 것을 기대하기 어려운 삶을 살아온 본드였지만, 그의 반복된 문제 행동에도 지속적인 도움을 주는 M의 행동은 본드의 이상화 자기대상 요구를 촉발시켰을 것이다. M은 본드에게 또 다른 이상화 자기대상의 역할을 하는 존재였으나, 부모를 잃었던 스카이폴 저택에서 M 또한 잃는 일을 겪게 된다. 그러나 이번의 본드는 부모나 베스파를 잃었을 때와 달리 어느 정도 감정을 조절하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M 사망 이전의 본드는 임무 시 쉽게 흥분하며 충동적으로 살인 후 죄책감을 느끼는 모습을 자주 보이나, 이후의 그는 그렇지 않다. M의 이상화 자기대상 기능으로 인해 본드의 자기는 아직은 결핍 상태이기는 하나 일부 회복하여 변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M의 사망 이후에도 본드는 요원직을 유지한다. 이후에 서술할 ‘마들렌’과의 만남 이전에 결핍상태인 본드의 자기애적 구조를 유지시킬 수 있는 보상적 수단은 유능한 요원으로서의 삶 뿐이었기 때문이다.
과대자기는 아이가 자신 스스로를 전능하고 위대하다고 여기는 자기애적 구조이다. 아이가 붉은 망토를 쓰고 ‘나는 슈퍼맨이다’라고 이야기하며 뛰어다니는 상황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공감적인 부모라면 아이의 과대감에 대해 호의적으로 반응해줌으로서 아이가 자기애적 만족을 충분히 누릴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아이는 자신의 현실적인 한계를 받아들이고 과대적 환상과 욕구를 포기한다. 과대적 환상과 욕구는 자아동조적인 목표와 의도들, 자아 기능과 활동들 속에서 얻는 기쁨, 현실적인 자존감으로 대체된다. 아이의 과대자기가 건강한 발달을 하는 데에는 공감적인 부모라는 거울 자기대상의 역할이 필요한 것이다. Kohut는 과대자기의 형성에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의 행동에 대처하는 부모의 인격이라고 설명하기도 하였다(Kohut 1971).
본드의 과대자기는 어떠하였을까? 아쉽게도 본드의 어린 시절에 대한 내용이 영화에 많이 제시되지 않았기에, 부모가 그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추측해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본드는 대저택에 살 정도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또한, 본드의 부모는 사망한 이후에도 관리인이 그들을 추억하며 홀로 저택을 관리해오고 있는 상황으로 볼 때 성품이 훌륭한 이들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로 말미암아 부모 사망 전까지 본드의 과대 자기는 적절한 반영과 공감 안에서 성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모의 사망, 학창시절 따돌림, 임시 가정에서의 공감 결핍 등 거울 자기대상 욕구가 지속적으로 좌절되는 상황에서, 본드의 과대자기는 핵심 자기에 통합되기 위한 적절한 반영과 공감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 놓이며, 외부 현실과 동떨어진 원초적 형태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본드는 자기의 위대함에 지속적인 환상을 갖게 되어 평범한 사람은 할 수 없는 MI6의 요원이 되고자 하였던 것 같다. 또한 과시성을 뽐내고자 언제나 근육질의 몸매를 유지하고 좋은 차와 시계, 옷만을 추구하였다. 심지어 그는 허름한 모텔에서는 하룻밤도 잘 수 없어 항상 최고급 스위트룸으로 변경하며 지내기도 한다.
Kohut는 자기애적 구조를 이상화 부모 이마고, 과대자기를 두 극으로 하는 양극성 자기로 설명하였으나, 이후 쌍둥이 자기대상 욕구는 과대자기와 독자적인 지위를 갖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쌍둥이 자기대상 욕구는 별다른 이유나 목적 없이 자신과 비슷한 사람과 함께 지내며 겪는, 이해하고, 이해 받고자 하는 욕구이다. 자신과 비슷한 사람은 또래이거나 같은 성별일 필요 없이 유사한 정체성 혹은 기능을 하는 존재이다. 또한 다른 자기대상 욕구들과 마찬가지로 쌍둥이 자기대상 욕구 또한 일생에 걸쳐 만족되어야하는 경험이기도 하다(Kohut 1984).
본드의 쌍둥이 자기대상 욕구는 적어도 부모가 사망한 이후부터는 그다지 채워진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는 부모 상실이라는 고난을 함께 겪어낼 형제조차 없었다. 한스의 아들인 프란츠는 시기와 질투만을 느꼈기에, 본드와 서로 이해할 수 있는 경험을 할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학교에서조차 본드는 따돌림을 당했다. 본드의 곁에는 그를 이해해주고 안정감과 응집성을 제공해줄 수 있는 쌍둥이 자기대상의 기능을 할만한 존재가 전혀 없었다.
쌍둥이 자기대상 욕구가 지속적으로 좌절되는 상태였던 본드에게 정신과 의사인 마들렌이 등장한다. 그녀는 비밀조직 스펙터에 소속되었던 화이트의 딸이기도 하다. 마들렌은 본드와 공통점이 많은 인물이다. 두 사람 모두 부모가 살해되는 경험을 하였으며, 당시 상황에서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며 좁은 공간에 숨어있을 수밖에 없어 무력감을 느꼈다. 또한, 부모 살해 이후 불안정한 삶을 살았으며, 개인의 능력이 뛰어나 비밀 요원, 정신과 의사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정착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 모두 겉으로는 화려한 삶을 살고 있을지 몰라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와 불안을 만성적으로 느끼고 있는 상태이다.
마들렌과의 만남 이후 본드는 더 이상 다른 여성들을 유혹하거나 하룻밤 성관계를 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스펙터’의 마지막 장면에서 본드는 다리의 한 쪽 끝에서 자신의 원수인 블로펠드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이전의 본드라면 지체 없이 방아쇠를 당겼겠으나, 그는 다리 반대편에 있는 마들렌과의 삶을 택하고자 총을 버린다. 또, M을 잃고도 요원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던 본드가 마들렌과의 삶을 선택하기 위해 요원의 삶을 기꺼이 포기한다. 이런 모습을 통해 그간 본드의 자기애적 구조를 유지시켜온 보상적 수단이던 요원으로서의 삶이 사실 그에게 매우 불안정한 수단이었고, 마들렌과의 관계가 훨씬 안정적으로 자기애적 욕구를 만족시켜준다는 것을 본드도 인지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본드는 이전까지 베스파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건의 배후를 찾아가 고문하는 등 분노에 찬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본드는 마들렌으로부터 ‘과거에서 벗어나야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는 조언을 듣고 ‘용서해줘’라고 쓴 쪽지를 태우면서 베스파의 죽음을 수용하고 적절히 애도하는 모습을 보인다.
본드는 마들렌과 공통된 점이 많아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무리가 없었을 것이다. 특히 부모 살해라는 커다란 정신적 외상 경험은 두 사람이 굳이 말로 하지 않더라도 서로 이해하고 이해 받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에는 충분했을 것이다. 화려한 삶으로 숨겨오기 바빴던 좌절감과 무력감이 서로의 공감을 통해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을 수도 있다. 단절되었던 쌍둥이 자기대상 경험이 재개되자, 그는 마치 정신분석가에게 분석을 받아 치유된 환자처럼 변화를 보였을 것이다. 그러한 변화의 결과가 자신의 딸 마틸다와의 만남 이후 본드가보여준 모습으로 설명된다. 본드는 자신과 똑같은 색깔의푸른 눈을 가진 마틸다를 위해 무엇이든 할 요량이었기에, 이전 시리즈에서는 전혀 보여주지 않던 외적으로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는 마틸다가 잃어버린 인형을 되찾아주기 위해, 임무 도중임에도 멜빵바지에 인형을 끼고 달리기도 하였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먼저인 삶을 살았으나, 마들렌과 마틸다의 안녕을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Kohut는 자기대상의 비공감적인 반응에서부터 자기의 상태에 결함이 온다고 보았으며, 자기대상의 공감을 충분히 받지 못했을 때(‘자극-결핍 자기’, ‘파편화된 자기’, ‘과부담 자기’)와 오히려 과도한 부담을 받았을 때(‘과자극 자기’)를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자기는 오랜 기간 자기대상의 적절한 자극적인 반응을 얻지 못하였을 때, ‘자극-결핍 자기’ 상태에 이를 수 있다. 이 때 환자는 끝없는 공허함을 느끼므로, 이를 제거하고자 매우 자극적이고 위험한 행동을 하게 된다. 자기대상의 기능을 충분히 내재화하지 못하였기에, 결핍된 자기애적 요구를 만족시켜줄 대상만을 찾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걸음마기에는 머리받기를 하며, 성장함에 따라 자위행위를 강박적으로 하거나, 청소년기 비행활동으로 나타날 수 있다. ‘자극-결핍 자기’ 상태에 있는 성인은 성적 양상으로 표현될 경우 난잡한 성활동이나 성도착증을 보일 수 있으며, 성적 양상으로 표현되지 않을 경우에는 알코올, 도박, 약물 등의 중독 형태를 보일 수 있다(Kohut와 Wolf 1978).
본드의 학창 시절 모습에 관한 이야기는 영화에 거의 소개되지 않지만, 성인기에는 다양한 ‘자극-결핍 자기’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본드의 집은 머니페니가 ‘최근에 이사를 했어요?’라고 물어볼 정도로, 필요한 물품만 제각기 놓여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Mendes 2015). 심적으로 안정된 사람의 집이라기보다 자신이 타인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임무 이외에는 삶에 대한 미련이 크게 없는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본드는 ‘스카이폴’에서 사망한 것으로 처리되어 요원의 삶을 중단하였을 때 어딘지 모를 해변가에서 임무 이외에 가치 있는 것은 없는 듯한 공허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는 위험천만한 요원으로서의 삶이 본드에게는 공허함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임을 시사한다.
본드는 이러한 공허함을 해소하고자 임무 뿐 아니라 술과 성관계를 수단으로 택하였다. 5편의 007 시리즈에서는 본드가술을 마시는 장면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나온다. 그는 ‘카지노 로얄’에서는 1억 5천만 달러가 걸린 포커 게임 도중 르쉬프가 술에 탄 독을 마시고 심정지에 이르기도 하나, 게임이 끝나자마자 또다시 술을 마신다. 그는 ‘스카이폴’에서 사망 처리되어 은둔생활을 할 때에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술을 마신다. 이에 그는 요원 복귀를 위한 정신감정을 받을 때에도 알코올 중독이 심한 상태로 평가된다. 본드는 항상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화려한 삶을 살고 있었음에도, 어린 시절부터 겪어온 자기대상의 결핍을 알코올로 달래고자 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본드는 매우 자극적인 성관계를 추구하는 편이다. 그는 처음 만난 여성들을 유혹하는 데에도 탁월하지만, 여성들의 유혹을 참아내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처음 만난과 여성들과 성관계하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유부녀들과도 잠자리를 갖는 등 난잡한 성관계를 하는 모습을 보인다.
본드의 긍정적 변화는 M과 마들렌의 존재와 연관된다. M과 마들렌은 본드에게 결핍되었던 자기대상의 기능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M은 앞서 기술한 것처럼 본드에게 이상화 자기대상의 기능을 하였다. 그랬기에 본드는 M이 위험에 처했을 때 은둔 생활에서 바로 돌아와 요원으로 복귀할 정도로 M을 아꼈다. 본드는 어린 시절 마땅히 받았어야 할 부모로부터의 보호, 안정감 등을 M에게서 느꼈다. M과의 관계에서 반복된 최적의 좌절 경험은 이상화 자기대상의 기능을 변형적으로 내재화하는 것을 도왔을 것이다. 이로 인해 그는 M을 상실하였을 때에도, 전처럼 무력감, 분노 등에 휩싸여 충동적인 행동을 하기보다 주변사람들과 함께 M을 애도하는 모습을 보인다. 다만, 여전히 유능한 요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삶을 살며 자기애적 구조의 결핍을 만족시키는 모습으로 미루어보아 그의 자기는 일부 회복하였을 뿐이다.
마들렌은 본드에게 쌍둥이 자기대상의 기능을 제공하여 본드의 멈춰진 자기의 발달을 도왔다. 그 결과 본드는 사람을 수단으로만 보던 과거와 달리 사랑하는 연인과 딸을 위해 목숨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하였다.
M과 마들렌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본드의 삶은 어떠하였을까? 또다른 자기애성 성격장애 영화 캐릭터를 통해 예측해보고자 한다.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의 주인공인 패트릭 베이트먼은 자기애성 성격장애로 이미 여러 논문에 서술된 인물이다(Hong과 Ha 2018; Parry 2009). 그는 하버드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27살의 어린 나이지만 월 스트리트의 금융회사 부회장이다. 그는 언제나 화려한 외모를 위해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으며, 보통 사람이라면 꿈꾸지 못할 사치스러운 생활을 이어나간다. 하지만 그는 조금이라도 열등감을 느끼거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발생하면 자기애적 분노와 함께 공격성을 드러낸다. 패트릭 베이트먼은 영화가 마칠 때까지 자기애성 성격에 큰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본드와의 가장 큰 차이는 M, 마들렌과 같이 결핍된 자기대상 기능을 해줄 주변 인물이 없다는 점일 것이다. 패트릭 베이트먼의 주변에는 자기대상의 역할을 할만한 인물이 없고 오히려 그와 유사한 인물들 뿐이기에 자기애적 손상이 반복되었다(Hong과 Ha 2018). 이는 곧 그가 살인을 일삼는 계기가 된다. “내 주변의 일상은 변함이 없고, 위선과 교만으로 무장한 인간들은 내게 아무런 관심이 없을 뿐더러 알려 하지도 않는다.”는 패트릭 베이트먼의 마지막 대사는 그의 삶 전반에 걸쳐 적절한 자기대상의 부재를 보여준다(Harron 2000).
아이가 성장하며 부모 및 주변인들로부터 적절한 공감과 반영을 받지 못하면, 즉 자기대상의 기능이 부전하면 응집된 핵심 자기의 성장이 방해를 받으며 자기애적 성격장애가 발생한다. 자기심리학 측면에서 자기애적 성격장애의 치료는 치료자와의 관계에서 자기대상 전이가 활성화되고, 점진적인 변형적 내재화가 이루어져서 멈췄던 자기의 발달이 재개됨으로써 자기의 결함이 복구되는 것이다. 환자는 자기대상인 분석가와 그의 기능을 변형적으로 내재화하도록 돕고 나아가 심리구조를 획득하게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며, 정신분석 상황은 이를 위한 환경을 제공한다. 앞서 기술하였듯이 이 과정에서 Kohut는 공감의 중요성에 대해 주장하며, 공감에 대해 다른 사람의 내적 삶을 같이 경험하면서 동시에 객관적인 관찰자의 자세를 잃지 않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Kohut 1959). 이때의 공감은 ‘남의 감정, 의견, 주장 따위에 대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다(National Institute of Korean Language 2024). ‘007 스펙터’에서 “암살자의 삶을 살며 늘 불안과 외로움 속에 홀로 지내는 것이 정말 괜찮나요?” 라며 마들렌이 본드에게 묻는다. 본드는 처음에는 유머로 넘기려 하지만, 재차 묻는 마들렌에게 “모르겠다”라고 답한다. 시리즈 내내 본인이 불안과 외로움을 느끼고 있는지조차 모르던 본드가 처음으로 자신이 매일 느껴오던 감정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본드는 마들렌을 믿고 함께 역경을 헤쳐나갈 수 있는 존재로 여긴다(Mendes 2015).
다만, 치료자는 환자와 같은 경험을 하지 않았기에 환자의 감정과 생각을 환자와 똑같이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인간적 한계로 인해 치료과정에서 환자의 자기대상 전이의 파열은 불가피하다. 이에 대해 Wolf는 3가지 요소가 치료적 대화를 회복시킬 수 있다고 하였다. 첫 번째는 치료자가 환자에게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을 제공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치료자의 공감적인 태도를 통해 환자가 정서적으로 확인 받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치료자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낸 환자 본인의 경험을 환자 스스로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Wolf 1993). M과의 관계에서 본드는 M의 태도변화를 이끌어냄으로써 파열을 회복하는 경험을 하였다. 본드를 처음 고용할 당시 M에게 본드는 사건이 발생하면 버리기 쉬운 고아에 불과하였다. M과 본드는 의견이 맞지 않아 서로 다투며, 심지어는 M의 지시로 본드가 다른 요원의 총에 맞아 강 아래로 떨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본드는 결국 임무를 완수하고 M과 화해한다. 이 과정이 반복되며 M은 본드와 그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된다. 자신을 믿지 않던 타인이 자신을 진심으로 믿게 만든 것은 본드가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치료자 또한 위와 같은 과정을 통해 자기대상 전이 유대의 파열을 회복시키는 새로운 경험을 제공함으로써 환자가 발달을 재개하도록 도울 수 있다.
본 논문의 가장 큰 제한점은 본드의 과거력, 가족력 등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묘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5편의 영화에 제시된 등장인물들의 대사, 본드의 심리검사 결과 등을 통해 그의 영유아 시기에 대한 내용을 최대한 모았음에도 충분한 정보라기에는 무리가 있다. 자기심리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모의 공감적인 태도와 그들이 거울 자기대상과 이상화 자기대상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는지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지 않았다. 부모의 평소 인성에 대한 내용은 그들과 오랜 시간을 함께한 저택 관리인의 본드 가문을 대하는 태도로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부모와 본드와의 관계는 큰 문제가 없었다는 가정하에 부모 상실이라는 외상을 겪은 후 본드의 삶에 대해 초점을 맞추었다. 또한 마들렌과의 관계로 본드가 쌍둥이 자기대상 욕구를 채울 수 있었는지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다. 본문에 제시된 바와 같이 두 사람은 부모 사망이나 따돌림, 불안정한 삶 등 다른 사람들은 경험하기 힘든 공통점이 많다. 다만, 영화에서 이에 대해 두 사람이 충분한 대화와 공감을 나누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두 사람의 과거력 상 다른 사람들은 전혀 공감할 수 없는 사건을 공유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또한 본드가 만난 수많은 여성들 중 마들렌에게 정착을 하려는 모습, 그녀를 만난 후의 생활상 변화 등이 자기심리학적 측면에서 쌍둥이 자기대상 전이와 공감으로 일어난 결과라고 추론하였다. 마지막으로 본 논문은 Kohut의 고전적인 자기심리학에만 근거하고 있어 Kohut 이후 상호주관성 이론, 특이성 이론 등 확장된 자기 심리학의 패러다임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한계점이 있다.
본 논문은 Kohut의 자기심리학을 바탕으로 영화 007 시리즈의 주인공인 본드의 자기애적 성격장애의 측면과 치료적 함의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본드는 어린 시절 부모의 살해, 따돌림, 외톨이 삶 등을 겪으며 자기애적 구조에 심각한 외상을 겪고, 이를 보상할 만한 자기대상 기능이 부재한 상태로 성장하였다. 자기대상의 부재는 본드의 병적인 자기애적 성향을 발달시켰다. 그는 겉보기에 화려한 삶을 추구하면서 타인을 착취하고 희생시키는 한편, 성관계와 알코올에 의존하여 내적 공허감을 달래려 하였다. 그의 삶은 M과 마들렌을 통해 자기대상을 경험하면서 달라지기 시작한다. M은 본드의 일탈에도 불구하고 본드를 신뢰했고, 본드가 위기에 처하면 항상 구해줌으로써 든든함과 안정감을 제공하였다. 본드에게 M은 이상화 자기대상의 기능을 하였을 것이다. 본드처럼 어린 시절 부모가 살해당한 어려운 경험을 겪은 마들렌은 그 존재만으로도 본드에게 공감과 이해를 제공하였고, 본드의 내적 공허감과 불안을 이해하고자 했다. 본드에게 마들렌은 쌍둥이 자기대상 역할을 제공하였다. 본드는 M과 마들렌과의 자기대상 경험을 통해 변형적 내재화를 거쳐 멈췄던 자기대상의 발달을 재개함으로써 영화가 진행될수록 이전보다 성숙해진 모습을 보인다. 본드와 M, 마들렌과의 관계는 자기애성 성격장애 환자와 치료자간의 자기대상 전이의 파열과 회복 과정을 이해하고 치료에 적용하는 데 참고할 만하다고 보인다.
None
The authors have no potential conflicts of interest to disclose.
Conceptualization: Chan Hee Lee, Myung Seon Song. Data curation: Myung Seon Song. Formal analysis: Myung Seon Song. Investigation: Chan Hee Lee. Methodology: Myung Seon Song. Project administration: Myung Seon Song. Resources: Chan Hee Lee. Supervision: Myung Seon Song, Soo Hyun Paik. Validation: Nak-Young Kim, Chan Hee Lee, Myung Seon Song. Visualization: Nak-Young Kim, Myung Seon Song. Writing—original draft: Chan Hee Lee. Writing—review & editing: Myung Seon Song, Chan Hee Lee, Soo Hyun Paik.